(3)
“일어났네? 오늘은 날씨가 그래도 좀 잠잠하니까 이제 다 같이 나가볼래? 여기 주민들만 아는 간판도 없는 맛집이 있는데 거길 꼭 데려가 주고 싶어서…”
일어나고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인간 꼴인지만 점검하고 거실로 나갔더니 남자 둘은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간밤에 아저씨가 해장거리를 미리 놓고 가셨지만 이 숙취를 이기고 그걸 조리해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참 춥네예. 강원도는… 오데 뜨끈한 해장국 되는 데 있습니꺼, 형님”
“먹고 싶은걸 말하는 게 메뉴인 집이 있지. 근사하지? 마님 일어났으니까 이제 슬슬 가볼까?”
“오빠들은… 잘 잤어?”
“왜… 잘 못 잤나? 내 귀신 이야기가 너무도 무서웠던 거 맞지? 것 봐, 자꾸 곱씹으면 엄청 무서운 이야기라니까…”
별 대답 없이 흘끗 장 선생을 넘겨보니 내 질문을 못 들은 양 난로 근처에 두어 덥혀 놓은 내 부츠를 내밀기만 한다.
“해장해야지. 가자.”
제대로 못 자고 엉망인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입으로 하고 있지 않은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만 그의 눈은 읽기 힘들었다. 차분하지만 서늘했다. 갑자기 그는 한층 더 멀게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그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빙어 낚시 때문이 아니라 어젯밤 귀신 이야기였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그들은 나름 숙면을 취한 모양 나의 상태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아침부터 해장 소주 한 병과 강원도식 섞어찌개에, 모닝 회도 한 접시 시키는 패기를 보인다.
“근데… 억수로 궁금했는데예, 어제 형님이 그랬잖아예.
복잡시럽고 바쁜 인생에 여자까지 사랑할 여력은 없었다고… 마 그라몬 야는 왜 만난 깁니꺼? 것도 야밤에?”
“말했잖아. 밥 같이 먹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고…”
“에이… 그라몬 밥 한 번 먹고 말면 되었지 뭐 하러 자꾸 만납니까.”
“…. 듣고 싶은 답을 정해놓고 막 모네? 좋으니 계속 만나지.”
“그게… 인마가 억수로 헷갈려 하더라고예. 내 옆에서 보기에도 그렇고… 행님은 노선을 마 똑똑히 하이소. 쑥스럽지만서도… 인마, 내가 아끼는 놈입니더. 아프게 하지 마이소.”
이 오빠가 어제 마신 술이 덜 깼나… 아님 아침 해장술에 새삼 맛이 갔나… 당사자가 무척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질문을 대놓고 해댄다.
“나는 나름 똑똑히 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고, 김 대리만 나와 다른 끝을 꿈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제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 김 대리?”
친오빠도 아니면서 내 동생 책임지라고 으름장을 놓아대는 촌스러운 강일이 오빠의 다그침에 장 선생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입은 웃고 있는데… 여전히 눈은 쓸쓸하다. 갑자기 가슴 한켠에 시린 바람이 분다. 그 순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남자를 사랑할수록 저 쓸쓸함은 나의 무게가 될 것이라는 걸...
“끝이 다른 사랑이 어딨습니꺼. 원래 사랑이 성공하면 호적에 남고, 실패하면 노래방 가사에 남는기라예.”
그 순간 문득 이 남자와 헤어지고 술에 절어 노래방에서 메들리로 처연한 이별 노래를 눈물로 열창 중인 내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소스라친다.
“우리 강일이 오빠야, 이제 막 프레시 하게 시작하는 연인한테 강력한 연탄재 많이 뿌리시네예? 마 그라몬 우리 사랑이 얼마나 꺼뜨리기 어려운가를 보여줘야겠네예? 김 대리야. 우리 강원도에서 아침부터 쌈빡하게 러브샷 한 번 뜨자.”
눈에 잠깐 서려 있던 쓸쓸함을 어디론가 숨긴 장 선생이 술잔 세 개를 성실하게 채우더니 건배를 권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하모, 하모.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지. 그걸 처음부터 걱정하면 누구를 사귀노.
그라는 오빠야 니는 왜 헤어졌는데. 니는 뭐 처음 사귈 때 헤어질 끼다… 하고 사겼나. 그리 둘이 결혼한다고 방정을 떨어 쌌더만.”
“원래 성공한 자들은 훈수 안 둬. 실패한 자들이 시끄럽지. 복덕방 앞에 김 씨 할배랑 최 씨 할배가 장기 한 판 뜰 때, 박 씨 할배가 훈수 두잖아? 알고 보면 그 박 씨 할배가 제일 하수라는 거… 일단 내는 망했지만 니는 내처럼 망하지 말라는 공익정신이라고나 할까?”
아픈 데가 꼬집힌 강일이 오빠는 잔뜩 부은 목소리로 응수하더니 홀짝, 잘도 잔을 털었다.
“걱정 마. 내 장 선생과 헤어질 때가 온다면 세상 누구보다 멋지게, 군더더기 없이 행복을 빌어주며 안녕할 테니…”
“세상에 쿨하고 멋진 이별은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노.”
“에헤이. 내가 보여준다고!”
“그래, 그러자. 우리가 산채비빔밥처럼 담백한 이별을 보여주자.”
잠깐… 이게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미리 계획할 일인지… 말은 내가 먼저 했지만 지금 저 남자의 결의에 찬 밝은 표정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참말로 멋지구리한 신세대 커플일세. 뭐 그다지 만리장성 쌓은 사이도 아닌데 벌써 노래방 이별 선곡하고 있으니…”
“원래 세상엔 성공한 커플보다 헤어진 커플이 더 많아요.”
우스개 소리롤 했지만 가슴이 쓰리기 시작한 나와는 달리 장 선생은 매우 덤덤하다. 연애의 끝이 장밋빛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미리 회색을 배경에 잔뜩 깔아 두고 연애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연애 염세주의자를 만났나… 그런데 나만 또 솜사탕 같은 동화스런 사랑이야기를 그려대면 남자가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여자들이 하듯, 속은 썩지만 엄청 담대한 척을 하고 있다.
“… 광어는 광어랑 결혼하고, 우럭은 우럭이랑 결혼하고, 참돔은 참돔이랑 결혼해. 왜 그런지 알아?”
오늘 아침 우리는 여느 청춘들이 그렇듯 사랑과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러 사랑에 대한 화두 중 처음 듣는 참신한 질문이다. 그리고 대체 이런 것도 질문인가 싶기도 한 질문이다. 광어 뱃살을 집다가 불현듯 장 선생이 사뭇 진지하게 물어와 별 가치가 없는 질문인데도 괜히 답을 생각해 보게 된다.
“같은 종이라서? 그러니까 사람도 같은 물에서 큰 사람끼리 만나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대한민국 정규 교육 과정을 받은 이들이 일단 이렇다. 문제가 주어지면 문제의 퀄리티를 따지기 전에 일단은 내가 맞춰야겠다는 그런 의지를 저절로 갖게 되는 후천적 본능이 살아나는 것이다.
“… 아니, 수명이 비슷하기 때문이야.”
“에이… 무슨 그런… 이 광어도 오늘 횟감 될지 알았겠습니까. 인명은 재천이고, 어명도 재천이고…”
“하하.. 그런가. 맞는 말이네.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아침부터 했네.”
강일이 오빠의 어명 재천설에 장 선생은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쉽게 동의했다. 일찍 떠난 고모가 살던 곳에 와서 가라앉은 건가…
저번에 제주도에서의 일도 궁금했지만 함부로 물어보지 못할 애매한 거리감은 여전히 있었다. 이 남자는 편해지나 싶으면 다시 어색하고, 마음껏 그를 탐구할만한 자유를 주려 하지 않는다.
“… 황 씨 있나?
우리 마나님이 속병이 나서 복국 한 그릇 퍼가야겠는디…”
익숙한 목소리에 입구 쪽을 돌아보니 어제 만난 별장 관리인 아저씨가 담배 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를 하얀 연기를 입에서 잔뜩 뿜어내면서 들어서고 있었다.
“에헤이… 이 젊은이들이 아침부터 또 푸고 있네. 적당히 드시소. 오후에는 서울로 떠나야 할 것 같으니까… 점심 지나서부터 눈이 또 슬슬 온다네… 슬슬 오다가 붓기 시작하면 오도 가도 못해. 이 시골에서… 공사 바쁜 양반들이 길이 막혀서야 쓰나… “
강원도의 겨울, 온통 흐린 회색으로 덮인 그 풍경은 쉬 가라앉게 한다. 타닥… 타닥… 별장 한켠에 놓인 벽난로에 장작이 한참 타고 있다. 그 피하기 힘든 따스함에 가까이 하자 어느새 잠이 들었다. 원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달리기를 백 번 한 것보다 더 피곤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