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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밤

(4)

by Hazelle

“고모는 그 몹쓸 병 때문에 간 게 아니잖아.”


원래 우리 집은 항상 조용했다. 평화로워 조용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며 겪는 그런 일들은 우리 집에도 언제나 일어났고, 아니… 보통 인간들이 살며 겪는 죽음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더 많이 겪음에도 불구하고 늘 고요했다. 이쯤 되면 알 것이다. 그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다. 극도의 긴장과 끝없는 스트레스 속에 암연처럼 가라앉는 절망이지…


재미도 없고 우울한 가족 모임은 꽤 자주 있다.

늘 가는 호텔 중식당 안쪽 룸에 들어서면 대체 언제 도착하는 것인지 항상 할머니가 미리 상석에 앉아 조용히 모두가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나서 안부를 묻는 것은 우리 집안에서는 중요한 일이니까. 묻는 안부를 답해야 하는 인간들이 몇 해 간격으로 하나씩 줄어 자리가 듬성듬성해지는 것은 어려서부터 보았다.


고모가 갔다.

어차피 이번엔 그녀의 차례임을 알고 있었다.

그때 어린 남자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다.


“고모는… 스스로 택한 거잖아…”


그때 처음으로… 그래 맞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태어나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세요.

자살하는 그 모든 사람들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에요. 몰려서 그런 거라고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죽는 걸 스스로 택했다고? 죽는 게 차라리 덜 무서우니 그런 거라고요.”


표정이 없이 침착한 집안사람들 중 장 민재는 좀 달랐었다. 어렸을 때 그녀는 많이 웃었고 파리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많이 울었다. 그녀는 사람이었다. 누구의 아기인지 말하지 않는 그녀에게 굳이 묻는 이도 없었다.

모두 그 아이 또한 일찍 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모양…

잘 웃고, 또 잘 울고, 고상함을 가장한 침착이란 것을 떨지 않는 고모를 많이 좋아했었다.


장 민재가 하지 말았음 좋았을 사랑을 시작할 때쯤, 남자는 의대생이 되었다. 남자는 알아주는 의사 집안의 네 번째 장손이다.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그의 인생은 정해져 있는 그런 것이었다.


“대체 이런 인생들이 남의 병을 고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주받은 유전병도 어쩌지 못하면서…”


어렸을 때 사람을 살린 의사로 자주도 언론에 오르내리던 아버지가 젊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름 끼치게 고요하던 장례식에서 눈에 담기다 넘친 눈물만 바닥에 끝없이 떨어뜨리고 있던 할머니 앞에서 삼촌이 울부짖었던 말이다.


그때 몹시 어렸던 남자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절망으로 바닥에 주먹을 짚은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너무 훌륭해서 가까이해 볼 시간도 별로 없었던 아버지. 아버지가 덜 바빠지면 같이 해보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았었다. 분명 아버지는 많이 아팠었는데 그 누구도 남자에게 자세히 알려준 이가 없었다는 것이 더욱 남자의 분노를 돋웠다. 그때 몇 발짝 떨어져 아프게 슬픔을 삭이고 있던 할머니가 했던 말이다.


“그러니… 너는 기술자가 되지 말고 발명가가 되어라.

누군가는 찾겠지. 이 고약한 병을 고치는 법을…

그게 너면 좋겠구나.”


“어머니. 어렵다고요. 안 된다고요. 모르시겠어요? 우리 집안엔 저주가 걸렸다고요. 그토록 변이가 많은데… 유전병을 무슨 수로 고칩니까.”


처음이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대부분 표정 없이 침착하던 삼촌이 그토록 상기된 얼굴을 하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대던 것은…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산다는 말 따위로는 쉬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배가 부르기도 전에 강제로 수저를 놓아야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질리도록 먹고 내 의지대로 그만 숟가락을 놓는 것과는 전혀 다르단 말이다.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도 화가 났었다.




“어이, 대만아. 너도 그만하고 이리 와서 같이 축구하자. 한 명이 모자라단 말야.”


“난 시간이 없어서…”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학교뿐 아니라 인근에서 내 이름을 모르던 녀석들은 없었다. 타고난 머리에 취미라곤 공부인 나를 이길 만한 녀석들도 별로 없었다. 점점 그들도 나도 서로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말 그대로… 난 시간이 없다. 항상. 친구를 만들 시간도, 그 우정을 유지할만한 공들일 시간도,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도, 아파할 시간도…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사랑은.

어느 날 교통사고처럼 휙… 네 인생에 끼어드는 것…

그게 사랑이거든.”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도 없는데, 며칠째 병실 침대 한 복판에 굳은 듯 오도카니 무릎을 끌어 세우고 앉아 창밖만 멍하게 보던 고모가 뜬금없이 했던 말은 사라진 줄 알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스란히 도드라진다. 아마 그때 그녀는 하염없이 사랑에 빠졌던 자신을 자책하다가 무심코 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편하지 않은 마음이 무거워 짧았던 밤을 누구보다 길게 견딘 것이 분명한 여자가 먼 길을 걷던 나그네가 잠시 맡기듯 내게 기대 가느다랗게 숨을 한 번씩 몰아 쉬며 잠이 들어 있다. 누구나 한 번은 한다는 그 근사한 사랑을 해 볼 심산은 절대 아니었다. 그날은 그저 누군가와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유독 추운 겨울날은 혼자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대만아, 죽으면 뭐가 안 좋은지 알아?”


그 늦은 일요일 점심이 절대 잊히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아빠와의 식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 안 죽어봐서 몰라요…”


나의 아버지는 심장 전문 외과의로 선천적 기형이 있던 아이들을 살리는 의사로 유명했다. 매일 생사의 문턱에 서서 그들을 붙잡기도, 또 보내기도 해 봐서였을까. 어쩌다 마주친 아들을 붙잡고 생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거…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맛있는 것을 나눌 수 없는 것. 그런 게 참 안 좋겠지. 허허…”


그다음 겨울에 꼭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 아버지는 매일 아침 급하게 병원을 향해 달리던 그 모습처럼 허둥지둥 떠나버렸다.

별 다른 인사도 없이…


그가 떠난 날 근처가 오면, 꼭 뼈까지 시린 그런 겨울날이면 난 혼자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날이 꼭 그랬다. 그날 나는 같이 밥을 먹을 누군가를 하루 종일 찾을 수 없어 그렇게 꼬박 굶다 여자를 만났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무언가를 기다려 본 적 있는가.

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꼭 오리라는 것을 알 때의 불안감, 두려움, 초조함… 그러다 막상 그것을 만나고 나면 깊게 가라앉는 안도 아닌 안도를 느낀달까. 그만큼 오래도 준비되었는지 그다지 크게 충격적이지도 않을 것 또한 예상했었다. 죽는 날까지 내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처럼 사명을 다 하여 하던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대로 여기에서 내 평범한 삶을 멈추고 계획 없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는 여전히 갈피가 잡히질 않는다.

우선은 한 번도 안 해본 짓을 하기로 했다. 달리기를 그만두기. 병원에 휴직계를 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별 설명도 없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미국 동부로 향했다. 보스턴에서 지내는 외조부모와 함께 저명한 대학병원 이곳저곳에서 검사를 받게 했다. 생활영어를 익히기도 전에 의학용어들을 영어로 유창하게 술술 말할 정도였으니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유전병을 고치는 기술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자명한 대답만 되풀이해 들어야 했다.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동부에서 서부로 혹은 뉴욕 근처를 가기도 했다.


“사막이 끝도 없어요…”


“… 너희 아버지는 늘 시간이 없어서 비행기 안에서도 학회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가도 가끔 너처럼 그렇게 사막을 내려다보면서 언젠가는 저 사막을 스포츠카를 타고 횡단하겠다는 아이 같은 소리를 하곤 했었어…”


어느새 몇 달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치 오래전에 존재했던 사람인양 덤덤하게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 덤덤한 슬픔이 결코 옅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채 삶처럼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내 사랑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 사랑이 갈 곳을 잃으니 아프구나.”


늦은 밤, 아버지가 가끔 앉아 빌리 홀리데이의 처절한 블루스를 듣던 그 자리 그대로 어머니가 앉아 같은 음악을 하염없이 들을 때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했던 변명이었다. 아마 그때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슬픔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알아준다고 사그라들 슬픔이 아니란 것을 알아서냐고? 아니… 그때는 떠난 아버지도 무심했고, 알고도 그런 사랑을 짊어지고는 결국 아파하고 있는 어머니도 답답했었다. 그런 그들의 사랑이랍시고 또 같은 운명을 그들 마음대로 지워 놓은 아들로서는 그 모든 것에 분노가 일 만도 하니까…


내 운명에도 놓여 있던 그 저주를 드디어 만난 날.

‘바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랬다. 바쁘느라 못했던… ‘중요하지 않았지만 궁금했던 것들’을 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또한 타고난 외과의사다. 손으로 하는 모든 것을 잘하는 편이다. 배워 본 적 없는 바느질도 여염집 아주머니보다 나았고,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음식보다 맛있게 하는 음식점이 드물 정도니까. 아마 평범한 인생을 타고났다면 솜씨 좋은 요리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병원을 쉬기로 했다.

어머니는 눈물이 말라 오히려 더 슬픈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봤을 뿐 별 말이 없었다.


“그래, 쉬고 싶을 때도 되었지. 너무 바쁘게 살았잖니.”


그녀도 나도… 그저 바쁜 것에 지쳐 쉬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도 우리는 그렇게 정했다. 나는 그저 조금 쉬고 싶은 것뿐이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내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궁금했던 것들’의 목록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했듯, 나는 그저 추운 날은 밥을 혼자 먹고 싶지 않았다. 온라인 채팅방의 인연은 깃털처럼 하잘것없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추운 날 밤에 만난 직장인은 지쳐 보였지만 살아 있었다.

본인이 얼마나 힘들게 20대를 헤쳐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연신 투덜댔지만 정말 그녀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대체 뭐냐고?

절대 죽음 따위는 지금 생각할 것도 아닌… 온전히 살아가는데만 집중하고 있는 것. 그것이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의 반증이다. 그녀는 오롯이 살아가는 데에 집중해 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데 익숙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평범한 하나.


제기랄.

문제가 생겼다. 이 여자가 나를 웃게 만든다. 별 말 아닌 말을 해도 웃긴다. 그다지 쿨하지 않은 듯한데 쿨하게 나의 사랑론에 동의하는 것도 또한 슬픈데 웃긴다. 속이 다 보이는 데 안 보이는 줄 아는 것도 귀엽다. 그리고 걱정이다. 이 철딱서니 없는 여자가 겁마저 없어서 말이다. 겁도 없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또 겁도 없이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하게 만든다.


소설가는 어떻게 글을 쓸까?

끝을 미리 정해두고… 마치 신인양 그렇게 글을 쓸까? 그 속의 주인공들이 아무리 열심히 온갖 짓을 해도 결국은 미리 정해둔 그 결론에 도달하도록? 혹은 정해두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 가려 써가는 글일까.

아무래도 전자 쪽이다. 운명이 그러하듯이… 그렇다면 나는 그 얄궂은 작가가 정해둔 결말을 향해 무기력하게 걸어가진 않을 테다. 내가 멈추고 바꾼다. 하지만… 그러기엔 꽤 용기가 필요하게 생겨 먹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는 결국 굴복할 것이란 것도 미리 알고 있다.


‘그만둘 수 있으면 지금 그만둬. 늦어서 곪기 전에…’


‘그러기도 많이 힘들어… 왜 많이 힘들지?’


‘… 이미 젖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그 빌어먹을 사랑이란 것에… 세상 어느 것보다 응큼하고 은밀하게 찾아와 한번 적시면 움직일 수 없는 본드처럼 굳어 버리기 시작하지. 이제 시작할 때 보다 백배로 힘들 거야. 그걸 떼어내기란…’


강원도 집에 오면 이렇게 우두커니 벽난로 앞에 앉아 고모와 속으로 대화를 했다. 꺼져가는 이 집안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살아 있던 불꽃이었다. 잠시 옆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잠이 든 여자를 한 번 들여다보았다. 눈꺼풀이 약간 들리는 것이 곧 잠이 깰 모양이다. 이제… 이 여자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직 나는 이기적이다. 이대로 두고 싶다. 잠시만이라도… 이 여자가 나를 웃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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