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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밤

(5)

by Hazelle

“어머… 얼마나 잔 거지? 깨우지 그랬어.”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뭐 그리 바쁘다고… 실컷 자고 나면 상쾌하게 출발할라 했지.”


“행님, 아무래도 여기 빙어낚시는 물 건너갔네예. 아까 눈태풍 올지도 모른다고 아재가 그라던데… 그만 가야 안 되겠습니꺼.”


“그래야지. 그럼 출발해 볼까?”


올라가는 길은 부득불 운전병 출신 민 강일 씨가 우겨서 핸들을 잡았다.


“이거봐라, 김 대리야. 보이나? 그 불미스런 사고는 내 운전실력과 하등 관계가 없었다는 거… 마 느끼지재? 내 깔쌈한 운전실력?”


“됐고, 올라가는 길에 안산 휴게소 꼭 들리라.

거기 버터구이 오징어랑 통감자 맛있대이.”


“그래? 휴게소에 뭐가 맛있고 그런 것도 다 알아?”


“지방이 고향이고, 서울에 살면 대충 고속도로 휴게소 어디에 뭐가 맛있는지는 알아줘야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다섯 시간이 넘는데 그나마 먹는 낙이라도 없음 어케 견뎌요.”


“너는… 참 평범해.”


“뭣이라?!”


“평범해서 너무 사랑스러워.”


“이 오빠야가 진짜 봐주니까 뭐라케쌌노. 내가 을매나 특별한 여성인데 평범이라는 욕을 하고 앉았노!”


“…. 으악… 닭살. 닭살로 인해 안전운전에 방해됩니더이. 그런 발언 좀 삼가해주이소.”


이 희한한 조합이 점점 익숙해져 가는데 어느새 서울에 들어서고 있었다.


“우째, 행님. 신촌 들렸다가 거기서 운전대 체인지 할까예? 아니믄 강남에서 우리 떨궈 주시면 알아서 택시 잡겠습니더.”


“빙어 낚시시켜 준다고 데리고 가서 술만 퍼마시게 해서 미안하네? 그런 의미로다가 또 사과주 한 잔?”


장 선생도 가만히 보니 술 쟁이다.


“아! 그라까예? 내사마 너무 좋지예.”


뭘 거절하는 법이 없고 세상에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기도 힘들 인간. 원래 남자 둘에 여자 하나면 그 여자는 세상 다 가진 여왕이어야 하는데 이 두 인간은 엉뚱하게 브로맨스를 꽃피우기로 했나 보다.


“그러면… 홍대 쪽이 나을라나, 신촌이 나을라나… 지금 이 시간에 주차하기는 홍대가 낫나?”


익숙한 구역 이야기에 신이 난 강일이 오빠가 인근 지역의 주차 사정에 통달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려는 참인데 그럼 그렇지… 한가한 듯 바쁜 백수 장 선생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네, 할머니. 네… 아뇨. 저 지금 서울입니다. 한 이십 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 어떤 상태예요? 바로 갈게요.”


“오빠… 어머니 괜찮으신 거야?”


통화내용은 짧디 짧은데 심상치 않다. 분명 또 누군가가 아픈 듯한데 장 선생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지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어, 우리 엄마가 아니고…

어쩌지,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네. 지금 바로 강남으로 넘어가야 해서…”


“아 무슨 소리야. 얼른 가. 얼른… 우리 여기서 그냥 내려줘. 신촌 다 왔는데 여기선 걸어가도 돼. 오빠… 조심해서 가고…

그리고 오빠!!”


비상등을 켜고 분주하게 차에서 내리는 한 편 운전석에 얼른 자리를 잡고 출발하려는 장 선생을 왠지 모르게 다급하게 불렀다.


“으.. 응?”


막 출발하려다 브레이크를 밟은 장 선생이 경황없는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조심해서 운전하고, 그리고 이번엔… 꼭 바로 전화해.”


진심이다.

또 이렇게 가 버리고 나면 언제 그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남자는 내게 풍선 같다. 꼭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어느 바람에 둥실 떠올라 약 올리다 멀리멀리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매여 있지 않은 풍선…


“아… 그래. 내일 전화할게.”


까만 승냥이 같은 그 남자의 재규어가 유턴 신호를 받아 황급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지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때리치아라.”


“뭐를?”


“저 장 선생.”


“또 뭐! 언제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행님 만난 것처럼 굴더만. 인간이 그라면 되겠나? 앞에서 꼬리치고 뒤에서 씹고… 진정 진상의 길 아니겠나 말이다.”


창전동과 창천동 어디메쯤 세웠나 보다. 조금 걸으니 익숙한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일이 오빠가 왜 그런 말을 다짜고짜 하는지도 알듯하다. 쉽지 않은 남자에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그의 가족사. 내가 강일이 오빠라도 때려 치우란 말을 할 테니까.


“진정 멋진 행님이지. 공부를 그렇게 잘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멋지노. 멋진 건 멋진 거고. 이거는 감당의 문제가 아니다. 그 고모님 집에 갔을 때 니는 뭐 못 느낐나?”


그 밤의 이야기는 … 그래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그 이야기는 두고두고 묵혔다가 어느 여름밤에 술 마시다 괴담 열전 할 때 내놓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오빠야 니 인생 성공하고 싶으면 그 귀신이나 미신 같은 거에 집착하는 거 끊어야 된다.”


“진짜 오빠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네… 이기… 나중에 후회한데이.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 그리 멀쩡한데 왜 연애를 한 번도 안 했겠노. 그라고 제주도에서도 가족 중에 누가 아픈 것 같아서 황망하게 갔다더만 오늘도 그렇다이가. 가족이 돌아가면서 자주 아픈 게 정상이가. 잘 생각해라이. 평범한 게 제일 행복한 거다.”


“그나저나 니 똥차는? 그 갓길에 계속 썩고 있어도 되는기가? 니 나중에 벌금 폭탄 받고 실성하는 거 아이가?”


“알겠다. 니 일 알아서 한다 이기제? 갑자기 딴소리하기는…

걱정 마. 이미 아부지 올라오셔서 처리해주시고 폐차시킸다…

삼 년 안에 차 산다 소리하면 이 차처럼 내도 폐차시킨다 하시더만. 쩝…”


“아버지 진짜… 공사다망하신데 다 크다 못해 늙은 아들내미 뒤치다꺼리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


강일이 오빠네 아버지는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실제로 만나면 그 기에 희한하게 눌리게 하는 무관 스타일인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있다.

아들이 연대 공대 갔다고 잔치했는데 알고 보니 공대라고 프로그래밍을 다 하는 건 아니란 것을 아시고는 억수로 화를 내셨다.


“내 그래서 오늘 집에 못 들어가잖아. 아버지 지금 딱 가부좌하고 마루 한복판에 소주 일병과 함께 기다리실낀데. 알재, 내 변기 만드는 거 공부하는 거 알고 나서 아부지가 타겟을 니로 옮긴 거. 콤푸타 잘하는 며느리 보는 게 지금 새 인생 목표다이가. 이미 차 퍼진 것도 니랑 가다가 그리 된 지 알고 있어. 오늘 잡히면 엄청 골치 아파. 봐서 내일 오후쯤에 들어가야 이미 내려가고 안 계시지. 아부지도 월요일엔 출근해야 하니까…

충호 오늘 알바하는 날이가?”


얼떨결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충호네 만화방이 있는 사거리 근처다.


“저기 위에…

야간이니까 지금 있겠네. 내가 또 만화방 브이아이피로써의 권력을 좀 행사해서 꽂아준 자리 아이가. 지금 가면 레귤러 백수들하고 내일 일요일이라서 신난 술 취한 인간들하고 꽉 찼을 건데… 그래도 내가 가면 신기한 걸 보게 됨. 없던 자리 생김!”


“마 대단한 권력자시네.”




“미쳤나. 느그 쌍으로 봉사가? 지금 대기한 사람들 안 보이나.

둘이서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자리 내놓으라 하면… 제가 무슨 알라딘의 지니입니까? 누나, 행님?”


한겨울에 어지간히 바쁜 모양 땀을 흘리면서 막 카운터로 돌아오는 충호가 꾀죄죄한 선배 둘을 보자마자 쏘아붙인다.


“어. 니는 알라딘의 지니지. 지니가 아니라 해도 시험 봐서라도 지니가 되어야지. 누가 이 꿀 잡을 소개했는데.”


“내한테도 니는 지니여야지. 니가 기거하는 그 하숙집은 누가 방 안 물려주면 절대로 네버 에버 못 들어가는 거 알지?”


“아 진짜… 깡패들. 있어봐 봐…”


원래 장사가 밑지고 판다는 거랑 만화방에서 자리 없다는 거랑, 밥집에서 재료 떨어졌다는 거랑… 세상에는 뻔한 거짓말들이 몇 개 있다. 충호는 절대 안 된다고 펄펄 뛰더니만 이내 기세를 꺾고 카운터 옆에 마치 자리가 아닌 양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두었던 것을 걷어내더니 멀쩡한 테이블과 2인용 소파 자리를 만들어냈다. 지니 맞구만…


“아니… 뭐예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왜 저 사람들 오니까 자리를 치워주고 난리예요?”


과연 저 흔들리는 육체와 정신으로 만화를 읽을 수나 있을런지 걱정스러운 대학생 커플이 갑자기 들어온 꼬질꼬질한 남녀가 없던 자리를 만들어내서 앉자 강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쟤네, 사장 측근이요. 저는 힘없는 알바… 아시지요?”


“아 진짜… 그런 법이 어딨…”


“자기야, 그만해. 저분도 지금 죽을 맛이야. 자기는 풍족해서 알바 같은 거 안 해봐서 그래. 원래 야간 알바는 한 네 배는 더 죽어. 정상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이 오거든.”


취했어도 건실한 남자 친구다. 풍족하다는 여자 친구 역시 갑작스레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도 떠올린 모양 충호에게 안쓰러운 격려의 눈초리를 보냈다. 지방 굴지의 독점 간장 회사 외아들인 충호에게…


“신간 어딨는가는 스스로 발로 뛰시고, 물도 셀프로 갖다 드시고, 여기서 선배 꼬장 부리면 파출소에 신고합니다. 그라고 오늘은 사장 아줌마 새벽에 불시찰 뜬다고 했었으니까, 계산도 제대로 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충! 호!”


불쌍한 후배를 착취한 두 선배가 뒤늦게 미안한 마음에 거수경례 구호를 ‘충호’로 붙여 성실한 유료 독자의 자세를 취할 것을 삼가 맹세한다.


“니 이거 봤나? 새로 나왔다.”


IMF 터져서 구직 막혀 이 만화방에 거의 살다시피 할 때부터 좋아하는 ‘이나중 탁구부’ 신간을 강일이 가져와서 내민다.


“아… 아직 못 봤는데… 그건 좀 있다가 볼래. ‘여왕님 여왕님’ 어딨어? 오빠, 그거 원래 여기 있지 않았어?”


“그 진짜 만화 같은 만화를 뭐 하러 그렇게 만화방 올 때마다 찾아쌌노. 이미 외웠겠구만. 다음에 중고 만화 파는데 가면 내가 사다 줄게.”


“행님이 살 필요 없을걸요. 그때 같이 왔던 의사 선생이 언제더라… 새벽에 와서 대여 만화는 안 판다고 했는데 아줌마한테 엄청 졸라서 사갔다. 벌써 우리 김 대리 파악한거지비.

우리는 쨉이 안 되는 고수다.”


툴툴거려도 착한 후배인 충호가 시키지도 않은 쥐포를 무심하게 탁! 테이블에 놓으면서 우리는 몰랐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허허…그 행님 참… 우짜면 좋노. 내 보기엔 아주 그냥 슬픈 결말이 자꾸만 예상되는데 말이지… 집안 내력이 뭔가 좀…”


나도 아는 맞는 말을 술술 쏟아내려는 강일이 오빠를 온몸의 기를 모아 째려보자 눈치는 살았는지 얼른 입을 닫는다. 머리를 비우는데 만화는 항상 도움이 되었었다. 운에 기대 살아야 하는 취준생 시절에도 만화방은 힐링의 장소였고, 그 어려운 취업난 뚫고 실컷 들어갔다가 보직 마음에 안 든다고 때려쳤을 때도 무작정 집보다 먼저 들른 곳은 이 곳이었는데 희한하게 오늘은 하나도 비워지지 않았다.

눈은 요상하고 기괴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장선생과, 그 밤과, 그리고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떠 다닌다.


“뭐 우짜겠노. 마음이 뭐 그야말로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라믄 마 그냥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고 행복하게 연애만 하던가…”


다문 줄 알았더니 여전히 신경이 쓰인 모양 옆 자리에 앉은 강일이 오빠가 쥐포를 뜯다 말고 결국 한 마디 덧붙인다.


“누나! 니 핸드폰 빠떼리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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