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이제 곧 끝난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눈이 내렸었다. 가끔씩 이렇게 눈이 내리곤 하면 뉴스에서 어김없이 사고 소식이 들려온다. 어렸을 때는 눈이 오면 그저 좋고 눈사람도 만들면서 놀 생각에 즐거웠다가 어른이 되고 나서는 눈이 온다고 하면 다들 걱정부터 한다. 출근이 어렵겠다거나 길이 미끄럽겠다는 등 어느새 낭만은 사라지고 현실 고민들에 더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 기점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눈이 좋다. 제대로 눈을 즐기지도, 어릴 때처럼 눈사람을 만들거나 스키장에서 눈 내리는 슬로프를 활강하는 것도 아니지만 눈이 내리는 그 자체는 알 수 없는 감상에 잠시나마 빠져들게 만든다.어릴 때 살던 아파트 단지의 좋은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던 곳은 오래전에 지어진 주공아파트 단지였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가 넓고 나무와 풀이 많으면서 단지 자체가 매우 큰 곳이었다. 살던 동에서 뒤로는 나무와 잔디밭이 크게 있어서 여름이면 풀벌레소리와 매미소리가, 겨울이면 하얀 눈밭이 되었다. 개인 정원도 아닌데 코 앞에 있는 들판에서 아이들은 눈을 굴리며 눈 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수 있었다. 차가 지나다니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모르는 외부인이 돌아다니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눈밭에서는 마음껏 뒹굴며 놀아도 다치지 않는다. 이런 추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눈이 내리고 퇴근길에 운전을 하며 멀리 눈 쌓인 나무와 산을 보니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눈이 뭔가 평소에 일상에 지쳐 단단해진 마음을 말랑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다. 몇 시간이 지나니 벌써 세상이 하얀 이불을 덮었다. 겨울에 추운 건 이상하지 않은데 눈이 올 때는 그 와중에 따뜻한 느낌을 받게 된다. 차들이 천천히 다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도 눈을 뿌리는 누군가가 일부러 세상을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닐까 상상해 봤다. 덧나고 무른 아기 엉덩이에 하얀 파우더를 뿌리면 뽀송해지듯, 상처 난 피부에 하얀 연고를 바르면 상처가 아물듯 우리 세상도 하얀 이불을 덮고 나면 바쁨이 느림이 되고 일상이 추억이 된다.
집 앞에 근처에 보이는 놀이터도 수북이 눈이 쌓여 리모델링되어 있다. 아직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데 아마 하루가 지나면 아이와 부모들의 발자국이 뒤엉켜 찍혀있을 것 같다. 내가 사는 곳이라도 저런 곳은 이제 일부러 먼저 지나가지 않는다. 처음 발도장을 찍으며 기뻐할 아이나 커플들을 위해 남겨두는 나의 배려이다. 뒷 산에 나무들에도 눈이 쌓여간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트리하나 놓지 않은 우리 집이지만 저렇게 트리숲을 보게 되니 위안이 된다.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와 함께 눈의 도움으로 잠시 감상에 빠져본다. 2023년 올 한 해 고생했다. 하얀 눈이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2024년이 금방 올 것이다. 새롭게 파이팅 하고 내년에도 눈이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