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속 데님과의 만남
의복은 계급을 드러낸다. 물론, 옷의 역사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진 못한다. 다만, 역사 과목을 좋아하고 수능 탐구과목에서 모두 역사 과목을 택할 정도로 역사에 크게 거부감을 가지진 않은, 얇고 넓은 역사 지식을 가져온 1인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공부할 때, 사진자료나 영상자료를 보면 의복을 보고 어느 세기의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인지 추측하곤 했는데 나름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추측해나갔던 재밌는 기억이 있다. 옷 글을 쓴다더니 왜 뜬금없이 역사 얘기를 주절주절 하느냐면 내가 옷에 '진지한 사람'이 될 방아쇠를 당겨준 소재가 바로 '데님'이기 때문이다.
청바지를 만드는데 쓰이는 이 소재는 푸른색 색상의 면직물이다. 패션 전문자료 사전의 정의는 '선염사(先染絲)로 능직 한 목면지. 질겨서 매우 실용적이다'라는 식의 서술이 되어있다. 뭔가 확 와 닿지 않는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독일계 유대인 리바이 슈트라우스라는 사람이 1871년 튼튼한 텐트용 천으로 만든 옷을 특허 내서 만든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를 떠올려보자. 이 글에서 쓸 데님 이야기는 그것과 같은 소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는 영화 보는 것이 취미였고 옷에 진지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영화를 볼 때에도 인물들의 복장에 자꾸 눈길이 갔다.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입은 가죽 재킷이 너무 멋있어서 가죽자켓에 빠졌고,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아미 해머가 입은 셔츠와 반바지 조합 때문에 '여름엔 청량한 색의 셔츠와 허벅지를 반쯤 덮는 반바지 조합을 꼭 입어보겠다.'라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상당히 잔인했기에 그때 산 반바지는 1년에 하루만 빛을 본 후 옷장에서 영면에 들어간 듯하다.
그렇게 배우들의 스타일에 이목을 집중할 시기에 가장 눈에 들어온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였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 노동계급 출신에서 자라는 빌리가 발레리노가 되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이다. 다만 단순한 성장 스토리가 아니라 당시 영국의 정치적인 계급갈등이 배경이 되는 이야기다. 영화는 20세기 영국, 대처리즘과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 속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파업으로 생계가 막막한 광산 노동자들의 상황 속에서 빌리의 아빠와 형은 빌리가 가진 발레리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빠와 형이 원하는 성역할, 노동계급의 취향, 강인한 남성의 모습, 어느 하나 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하튼, 영화는 이런 빌리와 주변 인물들의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노동계급들이 많이 입었던 옷들이 바로 데님 소재의 재킷과 바지였다. 영화 초반부에 빌리 역시 아주 화사한 연청 재킷을 입고 처음에 등장하길래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옷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때에도 가슴에 주머니가 달리고 기장이 짧은 형태의 트러커 재킷을 좋아했었는데 옷에 관심이 생기고 보니까 더 매력적인 옷들이었다. 단순히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선 튼튼한 옷을 선호했기 때문'이라는 기능적인 요소만 설명이 되진 않는 것들이었다. 디자인, 핏 무심한 듯 걸쳐 입는 느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계급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더 끌렸다. 나 역시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집안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전히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접했기에 계급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불편하지만 익숙했다. 특히, 빌리를 위해 파업 대열에서 빠진 빌리의 아빠와 그걸 만류하는 빌리 형의 대화는 다시 봐도 절절했다. "걘 겨우 11살이야. 기회를 줘야한다고. 걘 대성할 수 있어! 우리 꼴을 봐라!"라며 절규하는 그 모습을 마음 아파하면서 봤었다. 더불어 영화 내내 멋들어진 청자켓을 걸친 빌리의 형은 탄광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했으니 데님은 빌리 엘리어트와 함께 내 기억 깊숙한 곳에 흔적을 남겼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데님이라는 소재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 것은.
튼튼해서 몇 년이고 입어도 끄덕 없고, 계급성을 드러낼 수 있으면서도 예쁘고, 입다 보면 자연스럽게 워싱이 빠짐으로서 나만의 옷을 만들 수 있는 그런소재에. 물론 2021년 한국에서 옷과 계급성 이야기는 거의 해당이 안된다지만. (그럼에도 복장 규정이 있는 대부분의 회사는 청자켓은 안돼도 정장이나 세미 캐주얼이 기본값이니 이 얘기도 아주 틀리진 않다고 본다.) 데님의 매력에 빠진 나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허리 사이즈, 허벅지 둘레, 다리 길이, 아무것도 몰랐지만 옷은 입어보고, 사면서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한다는 패션 고수들의 말을 듣고 나에게 맞는 청바지를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군대를 갔다 온 지 얼마 안 된 대학생이 얼마나 돈이 있었겠는가. 당연히 쇼핑몰 필터엔 판매 순과 할인율 순, 낮은 가격순 세 가지의 필터를 걸고 탐색을 시작했다.
2021. 0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