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번에 한국에 방문하게 되면서 역으로 느낀 문화충격이랄까 아무튼 나를 불편하게 만들던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불평불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조금 아쉬웠다? 정도. 혹은, 내가 이제 한국에서도 이방인이 입장이 되어가는구나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언젠간 한국에 돌아와서 살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사그라지게 된 여행이었다.
이 부분은 내가 네덜란드에서도 작은 도시에 살고 있어서 더 심하게 느끼게 된 것 같다. 길을 지나가도 상점들이 틀어둔 뽕짝 메들리와 쿵쿵거리는 알 수 없는 EDM풍의 노래들이 막강한 볼륨을 자랑하는 대형 스피커로 끊임없이 재생된다. 번화가만 그런 거겠지, 싶었는데 길을 걷다 보니 개조를 한 듯한 배달 오토바이들와 국산 스포츠카가 빌라촌 사이사이를 무법 질주한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지고 귀를 막게 된다. 특히 이 따다다당- 혹은 부아아앙-하는 배기소음은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느껴진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자동차 관리법 제81조에 따라 불법 개조 오토바이를 운전하거나 개조한 자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되지만 이 소음 기준인 105dB를 넘지 않으면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하나 이 소음을 측정하려면 바로 옆에 딱 붙어서 데시벨 측정기를 대고 있어야 하니 그 자리에서 처벌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개조해서 다니는 인간들 한꺼번에 컨테이너 같은 곳에 몰아두고 자기네들 튜닝된 배기통 소리 계~속 들려주고 싶다. 귀가 웅웅 거려 봐야 정신 차리지.
소음공해에 이어서 내가 계속 시달리던 것. 특히 본가가 바로 큰 도로 옆에 위치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밤새도록 내내 켜져 있는 가로등에 간판 불에 밤잠을 설쳤다. 그럼 블라인드를 치면 되지 않냐,라고 하지만 블라인드가 살짝만 열려도 마치 대낮처럼 뚫고 들어오는 빛에 잠이 번쩍 깨기도 한다. 내가 그냥 예민한 게 아니라 이게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환경문제까지 일으킨다고 한다. 에코 매거진에 따르면, 빛 공해 노출에 피해를 입어 작물 수확량이 감소되기도 하고 달빛이나 별빛을 보고 이동하는 철새들의 이동에도 방해가 된다. 호숫가에 밤새도록 켜진 가로등에 플랑크톤이 성장하지 못해 녹조류가 증가하는 것도 이의 영향이라고 한다. 한국의 경우 이 빛공해 면적 비율이 89.4%로 세계 2위이다. 한밤중 우주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남한만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전에는 야- 역시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대한민국! 자랑스럽다. 였는데 요새는 잠 좀 자면서 일하자.라는 마음이 든다. 사람에게도 지구에게도 그게 순리인 것 같다.
전의 포스팅에도 썼듯이, 나는 공원을 참 좋아라 한다. 그런데 한국엔, 공원이 없다. 아니, 벤치도 없다. 그리고 쓰레기통도 없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한참 걷다가 좀 쉬어볼까, 둘러봐도 앉을만한 데가 없어서 그냥 길가의 턱에 앉거나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공원을 가려고 해도 나름 광역시인 내 고향에서 한두 개뿐이었다. 그나마도 버스를 타고 30분이나 이동해야 한단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도시자연공원이 오직 21개뿐이다. 네덜란드의 내가 사는 도시는 우리집에서 걸어서 3분, 10분, 15분, 그리고 30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공원들이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뉴욕의 경우에는 브로드웨이의 950m 구간에 벤치가 170개가 있는 반면, 가로수길에는 벤치가 3개뿐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짧은 산책로에 앉아있자니 위에서 말한 소음공해가 또 한 번 발생한다. 짜증이 확 밀려온다. 도심에서 휴식을 취하기가 이렇게 힘들다고? UN에서 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도시의 공공공간도 누구나 동등하게 점유권과 사유권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아파트 거주민이 아니라면 여기에 앉아있을 수는 있으려나 싶었다. 돈이 있다면 스타벅스나 카페에 들어가 앉아 쉬겠지만, 돈이 없다면 대체 어디에 앉으란 말이지? 서울은 전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커피숍이 제일 많다. 이런 커피숍들이 공원과 벤치를 대신한 것이다.
산책 중 목이 말라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서 마셨다. 버리려고 아무리 찾아도 쓰레기통이 없었다. 가정에서 나온 종량제 쓰레기봉투 위에 사람들이 자신의 쓰레기를 쌓아두고 가버린다. 도보와 도로가 너무 지저분했다. 빈 공터에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쌓아둔 폐기물이 그 누구의 관리도 받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담배꽁초는 물론 그 옆에 뱉어진 가래침들도 골목 구석구석 눈에 띈다. 연합뉴스에서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 서울 기준 약 1천750명이 쓰레기통 하나를 사용하는 비율이라고 한다. 이 쓰레기통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종량제 봉투값을 아끼려고 공공 쓰레기통에 가정폐기물을 투기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우리나라 시민의식, 좀 나아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나만 아니면 돼.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울부짖던 멘트가 문득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맹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보장이 되지 않은 노년층의 빈곤과 닿지 않는 복지의 손길이 눈에 띈다. 일주일에 하루만 쉬어도 한 달에 20만 원도 벌지 못한다고 한다. 어느 다른 나 라에 서보 보지 못한 고물 리어카에 자기의 몸집 3배는 돼 보이는 노인들이 하루 종일 도시를 전전하며 폐지를 줍는다. 대한민국이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지도 몇 년이 흘렀지만 대한민국 65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3.8%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건 노인에 대한 혐오와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의 책임 회피이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안타까운 현상을 낳게 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도 닭장 같은 유리벽에 갇힌 자그마한 티컵 사이즈의 동물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이번에 한국에 가게 되며 더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도 펫 샵에서 반려동물을 데려오는 것을 지양하자는 의식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걸로 알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도 길거리에 펫 샵이 난무했다. 세네 마리의 아기 고양이를 조그마한 유리벽에 가둔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작은 강아지들을 어미에게서 떼어내서 물도 마시기 힘든 공간에, 혹여나 너무 빨리 자라 상품가치가 떨어질까 봐 밥도 제대로 안 먹인다. 자라 버린 강아지들의 종착지는 어디가 될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죄책감을 넘어서 속이 메슥거리는 역겨움을 느꼈다. 한국은 특히 반려동물에 대한 유행이 있는 게 더 문제점이다. 어느 해에는 몰티즈, 그다음 해에는 요크셔테리어, 비숑, 웰시코기, 푸들, 말티푸.. 끝이 없다. 일명 '강아지 공장'에서는 이 유행에 맞춰 어미견이 계속해서 아가들을 낳고, 뺏기다가 죽는다. 유럽 같은 경우에는 이런 펫 샵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설명을 해주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장난감처럼 생명을 다루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나도 못 믿겠다. 한국에서 길을 가다 펫 샵이 눈에 띄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곤 했다. 펫 샵을 금지하자는 청원에 동의하는 서명을 했지만 뭔가를 더 도와주고 싶다는 책임감과 죄책감에 눈물까지 났다. 제발 펫 샵 좀 그만 소비하자.
의도치 않게 장문의 구구절절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불만 보고서가 되었다. 하지만 읽는 한국인들 모두 공감할 거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청원 동의와 주변에 알리기밖에 없는 무능력하고 powerless 한 이 감정에 살짝 우울감까지 느끼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한없이 자랑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렇게 가끔 방문하면 잊고 지냈던 점들이 훅 어퍼컷을 치며 들어온다. 변화는 우리의 몫이다. "내가 해서 뭐해, 변할 게 없어"라는 마인드의 사람을 만나면 정말 화가 난다. 우리부터 변하자. 쓰레기는 집으로 가져오고, 담배꽁초는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펫 샵에서 데려온 강아지들을 예뻐라 하는 지인에게 실태를 알려줄 수도 있다.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수도 있다. 집에서 나온 폐지들을 잘 모아서 전달해주는 방법도 있고. 아무튼. 대한민국 갈 길이 멀다. 나도 한국인이니까 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 않기에 나부터도 변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