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빈약한 상상력은 조선시대나 그 이전, 아니면 100년 후나 1000년 후를 상상하더라도 지금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그래서 먼 미래나 먼 과거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일단 지금의 면역력으로는 지금 시점에서 사는 게 제일 낫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고, 처음부터 없었던 편리함이라면 모를까 이미 적응해버린 편리함은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회용 생리대가 없어 매번 천을 빨아야 했던 시대를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그리고 세탁기가 없는 세상도 곤란하다. 지금 장기 여행 중이라 어제 처음으로 손빨래를 해봤는데 정말 중노동이었다.
어쨌든 현대 문명의 편안함을 지금처럼만 누리겠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멀리 가고 싶지는 않고, 시간을 돌리더라도 가까운 과거나 미래로 가고 싶다. 그런데 막상 시간을 이동해서 뭘 할 수 있냐 물으면 잘 모르겠다. 아예 시간을 돌려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라면 몰라도, 타임'머신'을 이용한다는 건 내가 시간을 여행해서 특정 시간대에 잠시 방문한다는 거 아닌가? 과거의 나, 미래의 나는 그대로 존재하는 채로 말이다.
예를 들어 <빅뱅이론>에서 레너드와 셸든이 룸메이트 계약을 하는 씬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셸든이 룸메이트 계약서에 다음과 같은 조항을 추가한다. 둘 중에 한 사람이 만약 훗날에 타임머신을 발명하면, 룸메이트 계약을 하는 지금 이 시점으로 가장 먼저 오기. 그리고 둘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방안의 허공을 열심히 응시한다. 당연히 어림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에게 타임머신을 이용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냥 관찰자만 될 수 있는지 사람들과 대화하고 개입할 수 있는지에 따라 어떻게 쓸지가 달라질 것 같다. 관찰자만 될 수 있는 거라면 50년쯤 뒤, 그러니까 미래로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위를 확인할 것이다. 나의 미래는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다. 지금 나의 유일한 소망은 사랑하는 이들의 자연사이다. 나랑 아직 잘들 놀아주고 있는지, 가끔 같이 노래도 하고 엉망일지언정 나와 춤도 추어주는지 궁금하다(물론 춤이 엉망이라는 건 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도, 개입도 할 수 있는 설정(?)이라면, 1년 8개월 정도 시간을 앞으로 돌려 누군가의 문간에 서있겠다. 못 들어준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싶다. 보고싶었던 만큼 눈물도 잔뜩 흘리고 싶다. 일단 내 얼굴이 기억보다 많이 상해 있어서 놀라지 않으려나. 2년쯤 멀리에서 왔다고 하면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짐작도 하려나. 알아채면 조금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도 있으려나. 내 눈물이 누군가의 선택을 막을 수 있는지만, 그것만 확인하고 싶다.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나에게 순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
그날을 기점으로 생긴 온갖 비가역적인 변화를 만나기 전의 나도 힐끔 보고 오고 싶다. 내가 지금 남들에게서 보면 내심 진저리치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세상 모든 비극이 나를 피해갈 거라고 근거 없이 믿어버리던 그 얼굴이 가끔 그리워서 몰래 한 번 보고만 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