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4_첫만남

by 벼르

난 사실 첫 만남이나 첫 인상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인생에 원래 있던 사람들의 존재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만큼 커다란 자극이 또 있을까? 우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친구나 가족, 연인을 단번에 찾아낸다. 나는 모르는 얼굴에 특히 관심이 없기도 하다. 얼굴 구분을 잘 못 해서, 새 얼굴을 한번 익히려면 엄청난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동아리에 새로운 단원이 들어오거나, 아는 사람의 모임 틈에 새 사람이 한 명 낀 상황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존재감은 매우 흐릿하다. 나는 아는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바쁘다. 처음부터 얼굴을 익히려고 너무 애쓰다가 그 사람이 몇 주만에 모임을 나가버리면 억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힌트가 되었겠지만 아예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얼굴을 모른 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과의 첫 만남은 나름대로 잘 기억한다. 소개팅을 해본 적은 없지만 소개팅처럼 말이다. 여행지에서 동행을 구하거나, 과외 학생을 처음으로 만난다거나 하는 자리는 나름대로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런 인연이 오래 가지는 않으므로 예외라고 친다. 대부분의 친구는 이미 아는 사람들 틈에서 만나고,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 결국 친해진다. 그래서 친해지고 난 후에 나에게 자기 첫인상은 어땠냐고 묻거나, 첫만남에서의 에피소드 이야기를 꺼내면 난 조금 곤혹스럽다. 미안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살다보면 아주아주 가끔, 원래 있던 사람들의 존재감을 뚫는 강렬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중학교 3학년에 배정된 반에서 나는 첫사랑 W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 건 당연히 아닌데 그를 보자 몹시 피곤해졌다. 친해지면 피곤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심한 따돌림을 당했는데, 그 끔찍한 학년에서 벗어나 주동자들과 멀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아침부터 내내 들떠 있었다. 그 들뜸이 모두 가라앉을 정도의 피로함이었다. 걔는 그러니까, 위험하게 느껴졌다. 세상 순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도. 나의 경계가 무색하게 그애는 나에게 장난을 걸었고 나는 새로운 학년에서도 인간관계를 망칠 수는 없었으므로 장난을 받아줬고, 1년 후에는 연인이 되었다. 걔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처음의 그 위험하다는 느낌이 나중의 아픔을 직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또, 스물두 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의 연인을 만났는데 이상하게 그는 새내기들 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너무 아쉬웠다. 당시 남자친구와 사귄지 2주 정도 지났던 시점이었다. 내가 지금 남자친구만 없었어도(!), 하면서 그애를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니며, 누가 사귀어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당시의 연인보다, 함께하면 내내 즐거울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2년 뒤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이외에 기억나는 첫만남을 떠올려보려 했는데 아무리 떠올려도 두 사람밖에 생각이 안 난다. 이렇게 강렬한 케이스 말고는 대부분의 첫 만남은 기억이 안 난다. 사실 두 사람을 제외한 전 연인들에게도 당연히 첫 만남이 기억난다고 허풍을 쳤는데 이 자리를 빌어 사죄의 말씀을 전한다. 아마 처음 만나는 자리라 삐그덕거리느라 바빠서 기억을 하얗게 잃은 게 아닌가 싶다. 요즘은 MBTI라는, 첫 대화소재로 아주 적절한 도구가 있지만 예전에는 첫 만남에 도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었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전공이나 물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같은 전공도 아니면서 전공을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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