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가장 시작하기 어려운 글이었는데, 왜냐하면 요즘 버틴다는 생각이 잘 안 들어서이다. 일상을 버틴다는 느낌이 있으면, 그래도 이거 덕에 버틴다고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텐데 최근에는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느낌이 안 든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기적인 우울에 시달렸던 나라, 이 가뿐함의 근본을 더듬어가면서 쓴 글이다.
내 몸은 운동이 지탱한다. 솔직히 난 운동을 행복해하는 사람은 아니다. 달리는 자체로 활력이 돌고, 무거운 걸 들면서 쾌감을 얻는...그런 사람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몇 년 전만 해도 허약하던 나를 운동이 강인하게 해주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온갖 잔병치레를 겪던 나였다. 중요한 일이 끝나면 꼭 몸살이 나고, 밥을 조금만 급하게 먹어도 위경련은 기본이었다. 걸어다니면서 먹은 초코 쿠키 하나에 체해서 하루종일 앓았던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냥, 힘이 없는 상태가 누구에게나 디폴트인 줄 알았다. 끝없이 졸리고 멍하고 발을 끌면서 걸어다니는 상태가 말이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운동이란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달리기만 주구장창 했다. 그러다 퍼스널 트레이닝을 시작했고 은사님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목표는 나의 재등록이 아닌 독립이었다. 보조가 필요한 동작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고 어디에서든 혼자 운동할 수 있는 종류 위주로 가르쳤다. 처음에는 살금살금 건강해지는 내 상태를 운동에 귀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회춘하나보다 하고 말도 안되는 농담을 했다. 그런데 운동을 쉬고 다시 하기를 반복하면서 운동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 몸 상태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팬데믹으로 헬스장이 아예 문을 닫았을 때 훅 떨어지던 체력을 아직도 기억한다. 언젠가부터 난 건강하다는 말까지 듣기 시작했다. 누군가 저 사람은 좀처럼 아픈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나를 두고 농담을 했다. 20년이 넘도록 스스로를 허약하게 여겨 왔던 나라 잠시 인지 부조화가 왔다. 그런데 따져 보니 정말 가장 최근에 아팠던 게 대유행 때의 코로나, 그러니까 2022년 3월이다. 음, 나는 나도 모르게 단단해졌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은 노래가 지탱한다. 나에게 노래하고 싶다는 욕구는 코인 노래방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코인 노래방과 합창의 간극은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운 끼니와 직접 요리해 정성껏 차린 음식만큼이나 크다. 삼각김밥만으로도 살 수야 있겠지만 그건 정말 생존을 위함일 뿐이다. 팬데믹 이전 마지막으로 노래했던 산속 한 교회에서의 찬조공연 이후, 한도 끝도 없이 합창단 연습이 취소되던 시기에 마음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기억한다. 노래를 하고싶은데 못 해서 서러워서 울었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나는 그만큼 진지했다. 다시 행복하게 노래를 하는 악몽 아닌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재작년 말 우연히 대학생 때 노래하던 동아리의 초대를 받아 지금까지 함께 노래하고 있다. 뮤직캠프 때는 너무 행복해서 펑펑 울어버리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노래를 못할 때 그렇게나 힘들었으면서 막상 작년을 채운 취미를 정리해볼 때 합창은 즉각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합창은 내 삶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삶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숨쉬기 힘들다가 숨을 쉬게 되면 순간적으로 감사하지만 곧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항목을 적기가 참 두렵고 망설여지는데, 그래도 적겠다. 나의 정체성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 지탱한다. 망설여지는 이유는 모종의 이유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에 쏟은 시간과 마음을 다른 어떤 일에 쏟았다면 전문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사랑은, 사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여전히 인간관계가 이렇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다니, 부당하다. 겨우 한 걸음 배우려고 사람을 하나 잃어야 한다는 것도 속상하다. 그렇게 잃게 된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가는데도 나는 계속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참 한심하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어버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무서워하는 것은, 누군가를 더이상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되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정체성은 사랑하는 일이 지탱한다.
튼튼한 세 축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 나는 버틴다는 감각 없이 가뿐하게 오늘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 가뿐함이 무색하게도 세 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무엇보다도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