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51_ 배신

by 벼르

이렇게 말하긴 쓰리지만 첫 걸음은 네가 뗀 게 맞다. 우리에겐 다음 주에, 다음 달에, 내년에 하기로 한 수많은 약속이 있었다. 나의 유치한 투정에 네가 맞춰준 것일 뿐일 수도 있지만, 나야 다른 사람이야, 하는 질문에 너는 항상 웃으며 나라고 말했다. 당연히 너였고 나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내 생일날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은 당연히 너였고, 네 생일날 가장 많이 축하할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그걸 먼저 깬건 너다. 너는 왜 마음이 바뀐 걸까. 나는 수도 없이 물었다. 그 이유가 내게 있어도, 네게 있어도 못 견딜 건 마찬가지여서 질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이유가 내게 있었다면, 행동을 달리 했어야 한다고, 이때는 어떻게 했어야 하고 저때는 저렇게 했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자책했을 것이다. 네게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뒤를 도는 그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끔찍한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네가 날 버린 이유는 너인가, 나인가. 어느 쪽이건간에 먼저 버린 쪽은 너다.


그리고 나 역시 징그럽게도 너를 버릴 것이다. 너에게 버림받는 그 순간에는 다짐했다. 네가 미안해할 만큼 너를 계속해서 좋아하자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네가 나를 돌아봐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짓가랑이를 계속 붙들고 매달리니까 네가 돌아보긴 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하던 표정은 아니었다. 너는 징그럽고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듣냐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같은 절망을 또다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너는 나를 싫어하게 되겠구나. 그리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한 번으로는 학습되지 않을 만큼 나는 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싫어한다. 너는 나를 싫어한다. 너는 나를 싫어한다. 그 사실이 대여섯 번쯤 반복되고 나서야 앞으로도 이 명제가 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차가운 현실이 실감났다. 나에게 선택권은 두 가지였다. 너에게 계속 질질 매달려서 너에게 더욱 미움받는 쪽, 하나. 내 안에서도 너를 어떻게든 지워서 다시 내 삶을 찾는 쪽, 둘. 전자는 얻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를 다 버려서라도 너를 가진다면 행복했지만, 나를 다 버리면 버릴수록 너에게서 멀어지는 그런 선택지였다. 그래서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이렇게 말하면 전부 변명처럼 느껴진다. 결국 나도 너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점차 지워가면서, 너를 무의미한 사람으로 만들면서, 너의 모든 행동에 무감해지면서, 스스로가 징그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자던 말을 내 손으로 허물어야 했고, 너의 배신은 나의 배신으로 이어졌다.


세상 사람들도 딱히 내 편은 아니었다. 너희 둘은 정말 잘 어울려, 정말 너 같은 애인은 없어, 걔가 헤어지자고 하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야, 그런 말을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어느새 내 앞에서 지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 너네 둘이 만나는 게 이상하긴 했어, 네가 이러니까 헤어지자고 한 거야, 그러니까 누가 사람에 기대래, 이런 말을 들으면서 세 번째 배신에 나는 어지러웠다.


너는 나를, 나는 너를 배신함으로써 나를, 우리가 갈라져서 세상이 나를 배신했다. 너의 배신은 나에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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