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 좌우명도 걸어놓자
왜 우리 좌우명에는 하라는 것만 있고 하지 말라는 좌우명은 볼 수 없을까?
우리는 각자 좌우명 몇 개씩은 갖고 있다. 인기 있는 좌우명은 대부분 긍정적 적극적인 내용들이다.
“하면 된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칠전 팔기”
그러나 금지 좌우명도 중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뇌신경계의 조절 신호는 Yes 신호와 No 신호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게으름 No’, ‘부정적 말(생각) No’, ‘남에게 지적하기 No’ 등이 내 금지 좌우명에 해당한다. 가장 최근에 추가된 것이 세 번째 ‘남에게 지적하기 No’다, 보통 가까운 사람에게 지적하기가 많다. 지적당하는 사람에게는 입에는 쓰지만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러나 최근 건강상담의에게서 배운 것은 우리 뇌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적을 받으면 부정적인 신호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면 일단 No 신호를 내보내고 뇌 활동의 위축과 경계심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배움이 아니라 위축과 방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은 지적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유인은 내 긍정 좌우명의 하나다. 고등학교 때 교훈이기도 하다.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 이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박할 수도 있는 말이나 일차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 누가 만들어주거나 보장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게으름이 있으면 자유와는 이별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글도 본 것 같으나, 내가 의미하는 게으름은 몸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 머리 쓰기 싫어하는 게으름이다. 요즈음 빅데이터 연구들이, 비행기 일반석 증후군과 같은, 오래 앉아있기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4시간 법칙이 있다. 앉아 있는 시간이 4시간을 넘어가면 건강 악영향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 앉기 4시간은 비활동성 4 시간을 말한다. 게으름의 유혹에 끌려다니면 “건강하게” “자유롭게”와는 안녕이다. 제 몸 눈치 다른 사람 눈치보기 바쁘니 무슨 자유인가?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유의 또 다른 큰 적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중간 신경 (Interneuron; 중계신경, 조절신경 등으로 번역되는) 은 신경과 신경을 연결하며 신경 회로를 만들어주는 신경들이다. 우리 뇌의 많은 부분들은 이 중간 신경들이다. 중간 신경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시냅스 간 신호가 있다. 즉 예스(excitory)와 노(inhibitory) 신호가 있다. 예스 신호는 여러 시냅스 신호들이 합쳐져서 임계치를 넘어야 신경이 반응한다. 예를 들면, 정보가 기억되기 위해서는, 정보의 강한 신호가 들어오든가, 정보신호가 일정 시간 유지되어 중첩되어야 기억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래서 기억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노 신호는 “안돼”이다. 위험 신호가 들어온 것이다. “모든 동작 정지”처럼 거부권 역할을 한다. (모든 No 신호가 거부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 뇌신경은 원시 동물과 차이가 별로 없는 거의 같은 신경 구조를 갖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No 신호는 위험 회피 수단이다. 거부권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언급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뇌에 굴레를 씌우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뇌 활동을 위축시킨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정적 징벌보다는 긍정적 당근책을 쓰는 것이 뇌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옳은 것이다. 이는 사실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침 셀리그만 교수가 긍정적 낙관적 언어 습관과 부정적 비관적 언어 습관을 가진 하버드대 졸업생들의 50년 추적 연구 결과를 비교 보고하였다. 두 그룹은 중년 이후의 건강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셀리그만, ‘심리학의 즐거움’) 부정적 신호에 취약한 뇌신경의 구조적 성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시생물이나 다른 동물들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폭격과도 같은 부정적 신호를 남발하지 않도록 금지 좌우명도 벽에 걸어두는 것이 어떨까? 가족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