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핸들

타자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by 방석천

작년 이세돌이 AI(인공지능) 알파고에게 ‘신의 한 수’를 두어 한판을 가까스로 건진 이후, 요즈음 프로 기사들은 알파고에게 완전히 투항한 상태이다. 최고수 박정환이 ‘정선으로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백기를 든 상황이다. 5집을 접어달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상황이 바둑에서만이 아니다. 골드만삭스는 수백 명의 애널들을 2-3 명만을 남기고 모두 해고하여 AI 프로그래머들로 교체했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AI에게 안면부지의 사람 얼굴 사진을 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맞추어 보라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물론이다. 우리 얼굴 사진까지 빅데이터가 다 갖고 있다면 모를까 어떻게 정보 일체 없이 얼굴만 보고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름 4개를 놓고 얼굴 사진만 보고 이름을 맞추라고 한다면 어떨까?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얼굴과 이름은 따로따로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당신 점수는 25점일 것이다. 4개 중 아무거나 찍으면 나오는 점수다. “아니야, 이름과 얼굴 어느 정도 관련이 있어.”라고 생각하며 고른다면 아마 당신 점수는 이 점수보다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얼굴 인식 프로그램을 장착한 AI 컴퓨터는 어느 정도나 맞출 수 있을까? 이스라엘에서 정말 이 실험을 하였다고 며칠 전 영국의 일간 신문이 보도하였다. 두 번중 한 번을 맞추면 50점, 4번 중 3번을 맞추면 75점이다. 우리가 하면 약 40점을 얻는다고 한다. 컴퓨터는 얼마나 맞추고 있을까? 약 60점이다 3번 중 거의 2번을 맞추고 있다. 아마 현재 해석 프로그램을 개선하면 이 점수는 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도 75점이다. 4번 중 3번을 맞추는 것이다. 얼굴만 보고 이름을 맞춘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애기 이름은 얼굴과 상관없이 대부분 지어진다. 애기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이름을 지어준다. 아니 애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지어준다. 부모가 오래 생각해 두었던 이름을 짓거나 작명가에게 가서 생년월일을 따지며 이름을 짓는다. 그러니 지어진 이름에 아이의 얼굴이 자라면서 따라간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이름에서 느끼는 사회의 통념이나 기대를 반영해간다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는 프랑스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쟈크 라깡의 해석을 떠올리게 한다. 이 경구는 우리에게 사람들로부터의 영향이 절대적이란 이야기다. 즉 주변 인풋이 우리 욕망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주변 인풋이 어떻게 우리 욕망을 결정하는가? 애기는 엄마로부터 사회를 배운다. 웃으면 엄마가 좋아하는 걸 보고서 애기는 자꾸 웃으려 애쓴다. 걸음마 한 발자국 떼먼 엄마가 손뼉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서는 더 걸으려고 한다. ’ 엄마‘하고 첫 말이 나오면 식구들이 탄성을 올리며 좋아한다. 그러면 ’ 엄마, 엄마‘하며 자꾸 더 말을 한다. 이렇게 아이는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 하며 사회를 배우고 자란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쯤에 아이는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여 ’나‘라는 존재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자기만의 삶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라깡의 경구는 자기의 꿈을 찾고 재능을 찾고 행복을 찾는 삶까지도 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이며 그래서 사람은 골수까지 사회적이라는 경구이다.


이런 철저한 사회성은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왔을 것이다. 공동생활 환경, 사회적 관념이나 기억을 기회 있을 때마다 운동, 감정 그리고 내분비 신경망으로 대뇌가 조절 신호를 그때그때 보내면서 시냅스를 강화한 결과일 것이다. 시냅스 강화는 유전자 스위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대뇌는 판단과 결정의 고비마다, 강한 이름을 가졌으면 카리스마틱 하게, 또는 순둥이 이름이면 유순하게 때로는 손해나 불만을 감수하고 참자는 조절 신호를 내 보낸다. 아이는 대뇌의 조절 신호를 운명처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며 행동한다. 뇌의 하향식 지시에 따르면서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AI가 이름을 맞춘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사회적 관념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라깡의 해석에 대한 실험적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뇌에서 이렇게 하향식으로 내려오는 사회적 통념이나 선입견 등이 절대적인가? 이러한 선입견, 기억, 습관 등 뇌의 지시로부터의 자유는 불가능한가? 무의식적 뇌의 지시에 대해 ‘아니야, 더 이상은 안돼’라며 독립선언을 할 수는 없을까? 요즈음에는 상향식 조절 신호가 하향식 조절 신호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사회심리학 실험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카리스마틱한 자신감 넘치는 자세를 잠시만이라도 취하면 호르몬 수치가 급격히 변하고 기분과 감정까지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변하여 자세가 의미하는 방향으로 따라간다는 신빙성 있는 실험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TED, A. Cuddy] 애미 커디의 자세의 즉각적 영향 실험을 말이나 표정 등에 대해서 적용한 실험 데이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사한 그러나 장기적 영향의 실험 결과는 존재한다. 하버드 신입생들을 선발해 긍정적 언어 습관을 가진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누어 50년 추적 관찰한 셀리그만 등의 실험 결과를 보면 긍정적 언어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70 세에 이르도록 성인병에 거의 걸리지 않았음에 반해 부정적 언어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40세가 넘으면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린다는 추적 관찰 결과가 보고되었다. 정신 상태와 감정이 자신의 말투를 따라 변한다는 증명이다.


우리는 뇌의 지시를 따라서 왼쪽으로, 또는 뇌의 지시를 거부하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뇌의 핸들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동안 우리는 나쁜 습관을 고치거나 선입견을 바꾸거나 할 때 단지 자신의 의지 하나에 의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지 하나로 고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생각 고치기나 습관 바꾸기를 어렵게 생각한다.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어렵게 생각하도록 우리 사회도 일조를 한다. 나쁜 사회적 관습을 바꾸는 일을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며 거창한 일로 생각한다. 우리는 상향식 경로를 가끔 경험하기는 하지먄 이 경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하향식 지시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향식 경로도 또 하나의 시냅스 경로의 강화일 뿐이다. 특별히 거창할 필요가 없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노라면 새로운 상향식 경로가 내가 애용하고 즐기는 경로가 될 수 있다. 우리 뇌가 때로는 습관을 따라 때로는 새로운 길을 찾아 핸들을 돌리는 대로 간다고 생각하면, 자동차 드라이빙처럼 뇌의 드라이빙도 즐길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그렇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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