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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Jan 20. 2020

산책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3)

저는 개를 키우고 싶지 않은데요 18

혁구와 산책할 때, 한동안은 최선을 다해 혁구를 따라다녔다. 혁구가 발을 내딛는 곳으로, 혁구가 뛰면 같이 뛰었고 혁구가 멈추면 나도 멈췄다. 갑자기 실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혁구를 보면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밖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산책만큼은 마음껏 즐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신이 나서 뛰쳐나가는, 힘도 좋고 기운도 센 혁구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기진맥진했다. 한 번은 청설모를 보고 흥분해서 달려들려는 혁구를 붙들려다가 넘어졌는데 이렇게 혁구에게 끌려다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를 훈련하는 여러 방법을 찾아보고 혁구의 기본적인 산책 연습을 시작했다.


줄을 심하게 당기며 앞서가려고 하면 멈춰 서서 진정시키기. 특히 산이나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사람이 앞장서서 걷기 (혁구가 달려 나가서 넘어질 뻔한 적이 있다)

산책을 하다가 이름을 불렀을 때 나를 보거나 나에게 집중하며 걸으면 간식 주기

가면 안 되는 곳으로 가려고 할 때에는 제지하고 몸으로 막아 방향을 돌리게 하기

'너무 신난' 상태로 산책 나가지 않기. 문밖으로 뛰쳐나갈 듯 들떠있으면 차분해질 때까지 리드줄을 내려놓고 기다리기


혁구는 연습을 시작한 지 몇 번만에 규칙을 제법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무조건 혁구에게 맞춰야 한다는 마음을 바꾸자 혁구가 고집부리는 일도 줄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책이 조금씩 편해졌다.

물론 요즘도 혁구는 여전히 길고양이를 만나면 쫓아가려 하고, 산책을 하러 나가는 걸 알면 신나게 궁둥이를 들썩들썩거린다. 달라진 것은 내가 혁구의 행동을 말리기도 하고 이끌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이라서 시간을 넉넉히 두고 혁구와 산책을 나섰다. 늘 걷던 길에서 혁구보다 몸집이 큰 보더콜리를 만났다. 혁구가 먼저 그 개를 보고 다가가려 했다. (혁구는 다른 개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지나가는 개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 그 개도 혁구를 보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두 개는 꼬리를 흔들었고 서로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맞추나 싶었는데 갑자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나와 그 개의 견주는 깜짝 놀라 황급히 둘을 떨어뜨렸다. 금방 진정돼 유유히 주인을 따라 가던 길을 가는 보더콜리와 달리 혁구는 분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듯 그 개를 쫓아가려고 했다. 흥분한 혁구를 진정시키려고 다가가 쓰다듬어 주는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혁구의 왼쪽 귀에 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반질반질 혁구 코 ⓒ bic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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