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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Jan 27. 2020

산책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4)

저는 개를 키우고 싶지 않은데요 19

혁구의 왼쪽 귀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보더콜리의 입질에 귀끝이 찢어진 것 같았다. 산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다른 개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대다가 일단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횡단보도 신호등의 빨간 불은 유난히 길었다. 다급한 내 마음과 같이 혁구도 처음 느끼는 아픔 때문에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수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바로 치료를 하려고 했으나 혁구는 몸부림을 치며 사람들 사이 틈으로 빠져나갔다. 문 앞으로 도망을 친 혁구가 몸을 터는 바람에 후드득, 바닥이 핏방울로 물들었다. 계속 피가 나는데 혁구가 가만히 있어 주지를 않으니 갑갑하고 애가 탔다. 겨우 겨우 혁구를 붙들었고, 피가 나는 혈관 끝을 태워 지혈을 하고 소염제 주사를 맞았다. 소독약과 먹는 약도 처방받고, 상처 부위를 긁지 못하게 목에 넥카라도 채웠다. 신나게 산책을 나왔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가는 혁구의 뒷모습을 보며 혁구에게도, 혁구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고단했는지 혁구는 크리킨디센터에 들어오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이 든 혁구 옆에 앉아 나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시간을 되돌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혁구와 보더콜리는 편안해 보였고, 친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상황을 잘 지켜보고 있었는데 두 개가 서로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할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혁구는 괜찮을까? 속상한 마음과 걱정, 후회와 무거운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그 후로 혁구는 한동안 넥카라를 한 채 산책을 다녀야 했다. 혹시라도 풀, 나무 등에 상처 부위가 쓸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혁구는 금방 이전과 같이 기운을 차렸고, 사람들이 신경 써서 돌본 덕에 상처는 잘 아물었다.



그날 일로 나는 '내가 혁구의 행동을 완벽히 헤아리고 예상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당시는 혁구를 돌보기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무렵으로 나는 산책에 제법 익숙했고, 아울러 반려견 교육책과 영상을 통해 혁구에 대해 나름 잘 알게 되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나는 그날 이후 '만약의 상황'을 생각하며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됐다. 이번에는 혁구가 다쳤지만 반대로 혁구가 다른 개나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책 중에 개를 만나면 그 개가 충분히 혁구를 보고 가까이 올 때까지 혁구의 호기심을 가라앉히며 기다리고, 다가오는 모습과 혁구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한번은 좁은 길에서 마주오는 사람이 있어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보며 "개가 많이 사납나 봐"라고 한마디 던지며 갔다. '아닌데요? 혁구 안 사나운데요? 혹시나 해서 조심하는 거뿐이거든요?' 하고 대꾸하고 싶을 만큼 괜한 오해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주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감정은 내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혁구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는, 혁구를 돌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혁구의 왼쪽 귀에 흉터가 남아있다. 혁구, 미안... ⓒ bic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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