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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Feb 17. 2020

이웃집 누렁이

개를 다루는 완벽한 방법 3 <마더>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봉준호 자체가 장르가 되었다(Bong Joon Ho has become a genre unto himself)”. 2019년 프랑스 칸영화제(Festival de Cannes)에서 <기생충>을 본 어느 외신 기자의 코멘트다.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이 있을까? 봉준호 역시 한 인터뷰를 통해 이번 영화제에서 들은 멘트 중 가장 감격스러웠고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며 굉장히 기뻤다고 밝혔다. 이 말은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봉준호의 영화를 한 장르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 봉준호 영화의 시대와 배경은 모두 다르고, 한 작품 안에서도 다채로운 이야기와 이미지가 펼쳐진다. 봉준호는 분명 장르영화감독이고 장르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그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비틀어내는 데 거침이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예측하기 어렵고 새롭다. 이런 날 선 기세와 낯선 전개는 ‘봉준호 장르’에서만 가능하며 ‘봉준호 유니버스(Universe)’ 안에서 질서와 안정을 찾는다.


<마더>는 ‘봉준호 유니버스’에서 유독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다. ‘봉준호 유니버스’를 태양계로 비유한다면 <마더>는 명왕성이다. (명왕성은 다른 행성들과 달리 공전 궤도가 더 길쭉한 타원형이고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다. 2006년 새로운 행성 정의에 의해 태양계에서 퇴출당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한국의 어느 흔한 시골이지만 사투리나 특정 지방색을 띠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 촌스러운 것들을 늘어놓았지만 인물들은 오히려 세련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물들은 영화 공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포토샵에서 오려 내어 배경에 갖다 붙여 놓은 듯, 이미지 파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작업 파일로 열면 인물과 배경의 레이어가 따로 나눠져 있을 것 같다고 할까? 게다가 한강이 무대였던 <괴물>보다 옆으로 넓어진 화면비율은 클로즈업된 인물들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이처럼 <마더>는 영화를 보고 듣는 감각적인 차원부터 그의 다른 작품들과 화면과 소리의 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인물과 배경이 어긋나 있는 경계선(화면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느끼는 선)이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인물에 더 몰입하게 된다. 봉준호의 영화 중에서 잠깐이라도 웃거나 울면서 한눈을 팔게 되지 않는 영화는 <마더>뿐이다. 그 이유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캐릭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봉준호 영화에서 흔히 존재하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인물이 없다. 물론 ‘날아 차기’ 같은 삑사리는 여전히 나오지만 그런 행동은 도준(원빈 분)의 바보 캐릭터와 만나며 웃음기를 싹 지워 버린다.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더>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인물들을 위한, 나아가 배우들을 위한 영화다. 흥행으로 큰 성공을 거둔 감독들은 다음 영화에서 자기가 정말 만들고 싶었던 영화를 만들곤 한다. 봉준호는 언젠가 한 번은 배우를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그것이 김혜자에 대한 헌정 작품인 <마더>가 아닐까? 그래서 <마더>는 ‘봉준호 유니버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외롭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마더, 도준, 진태 세 사람의 캐릭터와 첫인상이 드러난다.


작두로 약초를 써는 마더(김혜자 분)의 손, 쓰윽- 쓱- 약초가 썰리는 소리, 밖을 쳐다보는 마더의 얼굴, 차 지나가는 소리, 마더의 얼굴을 스치는 빛. 길 건너편에서 개와 놀고 있는 도준, 그 옆에 진태(진구 분). 다시, 약초를 써는 마더, 쓰윽- 쓱-, 마더의 얼굴, 차 소리, 개와 놀고 있는 도준, 자전거 소리. 다시, 작두의 칼날에 가까워지는 마더의 손, 개와 놀고 있는 도준, 차 소리, 놀라는 마더의 얼굴, 손가락을 베는 마더, 도준을 치고 가는 차. “도준아!” 외치며 뛰어 나가는 마더.


오프닝 씬 이후 <마더>의 첫 시퀀스다. 대사 한 마디 없는 이 장면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무섭도록 서늘하다. 작두로 약초를 썰고 있는 마더의 장면과 길 건너편에서 개와 놀고 있는 도준의 장면은 교차 편집되어 엄마와 아들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긴장 관계를 설정한다. 많은 관객들이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김혜자와 원빈이 모자지간이라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감독은 첫 시퀀스에서 도준과 진태 중 누가 마더의 아들인지에 대한 답을 확실히 한다. 거기에는 두 남자의 첫인상이 큰 역할을 하는데 개의 앞발을 들어 인사를 하는 도준과 껄렁껄렁해 보이는 진태가 있다. 아마 진태 같은 아들을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은 첫 시퀀스에서 도준이 데리고 노는 개 한 마리뿐이다. 도준이 같이 놀고 있는 개는 늘봄사진관 앞에 있는 것으로 봐서 마더의 이웃인 미선(전미선 분)의 개일 것이다.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덩치 큰 이 개를 누렁이라고 하겠다. (시골 개들은 누래도, 하얘도, 심지어 까매도 누렁이인 경우도 있다.) 도준은 누렁이를 만지고 안으며 같이 놀아 주지만 진태는 별 이유 없이 누렁이를 발로 한 번 툭 치고는 의자에 앉아 휴대폰만 만진다. 이처럼 누렁이를 대하는 태도로 두 인물의 첫인상이 결정되는데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고 ‘도준은 착하고 진태는 착하지 않다(또는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준을 친 뺑소니 차를 향해 “야이 개 XX야!”하고 바로 욕설을 내뱉는 진태를 보면 마더의 대사처럼 진태는 질이 나쁜 아이인 것 같다.



장미, 희봉, 동익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애정이 동물을 향하지 않을 뿐이다.


<마더>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전에 봉준호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먼저 짚어 보는 게 좋다. 그의 영화에서 동물을 좋아하거나 동물의 생명을 소중히 다루는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짝은 동물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현남(배두나 분)은 개를 죽인 범인을 쫓고 개를 구해내지만, 그의 친구 장미(고수희 분)는 옥상에서 떨어진 비싼 쌍안경의 상태가 더 중요하지 개가 살고 죽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옥자>에서 미자(안서현 분)는 옥자를 데려오기 위해 서울로 가겠다고 한다. 미자와 단둘이 살며 옥자를 같이 키운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분)은 집을 떠나려는 미자에게 옥자도 결국 목살, 등심, 삼겹살, 사태가 될 돼지고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기생충>에서 연교(조여정 분)는 개들을 안아 주고 간식부터 산책 방법까지 살뜰히 챙기지만 그의 남편 동익(이선균 분)은 자신을 반기는 개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동물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왠지 차갑고 냉정할 것 같다. 하지만 장미, 희봉, 동익은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동물에게만 관심이 없을 뿐, 자신의 짝(사람)에게는 강한 애정을 보이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장미는 개를 죽인 사람을 잡지 못해 분해 있는 현남의 화풀이를 다 들어준다. 날아 차기를 제대로 못하는 현남 대신 자동차 사이드 미러를 부러뜨려 주고, 술에 취해 잠든 현남에게 어깨를 내어 준다. 장미는 현남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친구다. 미자는 옥자를 찾으러 가겠다며 저금통을 들어 바닥에 던져 깨뜨린다. 오로지 옥자를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돈을 주워 담는 미자와 달리 희봉은 “위험해, 위험해, 움직이지 마.”라며 손녀가 다치는 것을 먼저 걱정한다. 또, 미자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머리가 어지러우면 먹으라며 도라지를 챙겨 준다. 동익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멋진 아빠다. 동익은 회사뿐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하다. 심지어 그는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들에게까지 친절하고 착한 사장님이다.



진태는 나빠 보이는 사람이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진태는 도준이 감옥에 있을 때 면회 한번 오지 않는 매정한 친구다. 마더는 도준이 ‘질이 나쁜 아이’인 진태와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고, 심지어 진태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진태는 도준의 유일한 친구다. 그들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사연을 알 순 없지만 진태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인 도준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손해다. 그럼에도 진태는 도준을 다치게 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준을 지켜 준다. 진태는 마더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다. 진태는 자신을 범인으로 신고했던 마더에게 위자료를 요구하며 협박하면서도 “당연하지 엄마, 지금 도준이가 이 짝이 났는데. 내가 걔 친구잖어.”라며 마더를 돕는다. 남편도 없고 아들은 바보인 마더가 형사, 변호사 등 남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앞에서 무력해질 때, 때로 폭력일지라도 물리적 힘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은 진태밖에 없다. 두부를 들고 출소한 도준을 찾아가는 것도 마더가 아닌 진태다.


누렁이를 대하는 태도로 ‘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구축됐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한 사람, 아정(문희라 분)을 죽인 사람은 도준이다. 마더 또한 하나뿐인 아들을 지켜내는 엄마이지만 동시에 고물상 노인(이영석 분)을 죽인 살인자다. 관객들은 보통 영화를 보면서 착한 사람의 입장을 지지하고 그의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그런데 <마더>는 관객들이 받아들인 인물들의 성격이나 첫인상과 반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신이 만약 도준이나 마더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면 어느새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캐릭터와 행동이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봉준호의 영화를 특정 장르로 구분하지 못하고 ‘봉준호 장르’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릴 수밖에 없는 건 캐릭터와 행동이 어느 한 편으로 고정되지 않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가장 크다. <기생충>이 봉준호의 다른 영화보다 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른 것은 선악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주인공 한두 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려 열 명이 고른 비중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별로 쓸 데 없는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누렁이를 통해 도준과 진태라는 인물을 설명하듯이 봉준호는 영화에서 동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만약 배우들이 개를 만지지 못하고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감독은 <마더>의 첫 시퀀스를 어떻게 연출했을까? 영화 속 동물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괜히 이런저런 것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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