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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Feb 12. 2020

왕치, 흑염소 그리고 시골 개들

개를 다루는 완벽한 방법 2 <살인의 추억>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통해 90년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의 뒷모습을 비췄던 봉준호는 다음 영화에서 시대를 80년대로 앞당긴다. 형사 두만(송강호 분)을 따라 경운기를 얻어 타고 털털털털 시골길로 들어서면 추수를 앞둔 벼들이 황금빛으로 일렁인다. 논은 사람들의 삶터이고 일터이자, 시골의 앞모습이다. 영화 내내 개지 않는 우중충한 하늘, 이따금씩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 보면 ‘추억’이라는 단어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시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애(이재응 분)의 얼굴로 시작해 두만의 얼굴로 끝나는 <살인의 추억>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가 개봉했던 당시에는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에 -2019년 DNA 일치와 범인의 자백으로 진범이 밝혀졌다- 그 시대를 살았던, 그 사건을 알고 있던 관객들이라면 영화에서만큼은 범인이 잡히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그전까지 영화사에서 흔치 않았던 ‘범인이 잡히지 않는 범죄영화’로 장르만 비틀어낼 뿐, 거의 30년 동안 이어져 온 한국사회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옮긴다. 영화의 결말이자 현실인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오프닝 씬 하나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남자애가 벼에 앉아 있는 방아깨비 한 마리를 잡는다. 남자애는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경운기에서 내린 두만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남자애는 손에 든 유리병을 몸 뒤로 숨긴다. 유리병 안에는 아까 잡은 방아깨비 같은 곤충들이 여럿 들어 있다. 두만을 데려 온 농부(신동환 분)가 남자애에게 “저리 가”라고 여러 번 말하지만 남자애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배수로 안으로 들어간 두만이 깨진 거울 조각을 주우려고 잠시 몸을 일으키는 사이, 남자애는 손에 든 유리병을 쨍그렁 흔들며 두만 옆을 유유히 지나간다. 두만은 그 유리병을 보지 못한다. 두만이 거울로 배수로 안을 비추자 손과 입이 꽁꽁 묶인 시체가 보이고 그 위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애 손에 들려 있던 유리병이 보이지 않는다.


두만은 남자애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가 곤충을 잡았다는 것을 끝까지 알지 못한다.


유리병은 어디에 있을까? 공기가 통하지 않는 꽉 막힌 뚜껑, 뜨거운 태양이 달구는 유리병 속에서 곤충들은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남자애가 잡은 방아깨비는 알을 밴 듯 몸이 부풀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산란기를 앞둔 왕치(방아깨비의 암컷)로 추정된다. 왕치에게서 공포 속에서 떨었을 여자들이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감독은 너무나 쉽게 왕치를 잡는 남자애를 통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희생자와 살인자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보여 준다. 두만이 배수로 밑을 볼 때, 카메라는 초점을 메뚜기에서 두만으로 옮기는데 감독은 곤충의 실루엣을 보여 줌으로써 ‘곤충=희생자’라는 의미를 이미지로 재차 확인시켜 준다. 다시, 유리병은 어디에 있을까? 만약 다른 누가 그 유리병을 발견한다고 해도 이 남자애가 한 짓이라는 걸 바로 알아낼 수 있을까? 범인은 살인을 숨기고, 형사는 눈앞의 범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살인은 범인에게만 ‘추억’이 된다. (오프닝 씬의 남자애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엔딩 씬의 여자애도 이름이 없다.)


이처럼 오프닝 씬은 <살인의 추억>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상징하는 바가 크며 왕치와 메뚜기는 아주 중요한 의미와 이미지로 활용된다. 두 곤충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버려진 시체와 열악한 환경의 시골집에 벌레들이 꼬여 있는 장면이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새떼가 어둑한 하늘을 덮고 있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별다른 해석이 없어도 처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려고 했다거나 곧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재미있어서,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자칫 몰라보고 지나칠 뻔했지만 다행히 이 영화에는 동물 두 종이 더 나온다.


흑염소는 한국의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로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경운기를 타고 시골길을 누비던 영화는 어느새 기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 형사들뿐 아니라 모든 관객이 범인으로 믿는 세 번째 용의자 현규(박해일 분)가 등장하며 영화는 절정을 향한다. 현규는 강력하게 혐의를 부인하고 형사들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수사가 지지부진한 상황, 그때 전화벨 소리가 경찰서를 울린다. 따르르릉-. 사건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나올까? 하지만 그것은 두만을 불러내는 설영(전미선 분)의 전화다. 설영은 범인을 잡느라 고생하는 두만에게 영양제를 놓아주면서 말한다. “진짜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이건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뭐 다른 거 할 거 없어? 형사 그만두면 안 돼?” 두만은 그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크게 한 번 쉴 뿐이다. 두 사람 옆에서 흑염소 두 마리가 노닐고 있다.


감독은 <살인의 추억>에서 동물들의 행동과 소리 그 자체를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기술적 장치로 활용한다. 흑염소는 화면에 놓인 산, 강, 나무, 갈대, 들판 등과 함께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만들어 낸다. 멈추지 않는 살인, 밤낮없이 이어지는 수사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두만은 그 풍경에 기대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한다. 이 씬의 마지막 컷에서는 만화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콘티를 직접 그릴만큼 그림실력도 뛰어난 봉준호는 영화감독이 아니었으면 만화작가가 됐을 거라고 대답할 정도로 만화광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영화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날아 차기’나 ‘자빠지기’ 같은 이른바 ‘삑사리의 아트(art du piksari)’가 만화적 상상력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웹툰이 아닌 책으로 만화를 보던 시절, 코믹 만화를 즐겨 본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거나 상황을 마무리하는 컷에서 점을 몇 개 남기며 “까악~”하고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형사 그만두면 안 돼?”라는 설영의 질문에 두만 대신 흑염소가 대답한다. “메에~”. 영화의 마지막, 두만은 형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용의자 병순(류태호 분)을 쫓는 시퀀스에서는 두 마리의 개가 따로 한 번씩 나온다. 병순은 늦은 밤 야외에서 자위행위를 하다가 인기척을 느끼자 무작정 도망친다. 잠복해 있던 두만, 용구(김뢰하 분), 태윤(김상경 분)이 그 뒤를 쫓는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시골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추격전을 본 적이 없다는 감독은 80년대의 시골 공기를 화면에 흠뻑 불어넣는다. 굽이굽이 굽은 골목길을 형사들과 함께 달리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 온다. 탁월한 리듬감으로 긴장감과 박진감을 더해가던 추격전은 태윤을 따라서 소현네 집으로 들어가서야 숨을 고른다. 음악도 소리를 죽이다가 멈춘다. 태윤은 소현 엄마(염혜란 분)에게 “여기 이상한 사람 안 들어왔어요?”라고 확인하고 나서 다시 병순을 쫓으러 나가고, 소현(우고나 분)은 태윤을 알아보고 친구인 남주(이옥주 분)에게 예전에 초소에서 만났던 형사라고 말한다. 소현이 이상한 사람을 아는 체를 하자 소현 엄마가 소현에게 묻는다. “아는 사람이야?”.



시골에는 몇 집 걸쳐 한두 마리씩은 꼭 개를 키운다. 그 개들은 마을과 사람들을 지킨다.


소현네 집은 개를 키우고 있다. 이 상황에서 정작 ‘이상한 사람’은 태윤이고, 이 장면에서 ‘이상한 태윤’보다 더 이상한 건 짖지 않는 개다. 시골 개들은 보통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쉬지 않고 짖어댄다. 그런데 태윤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왜 개가 짖지 않았을까? 우선 드는 생각은, 인물들의 대사가 중요했기 때문에 동시녹음에서 개 짖는 소리가 겹치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기술적인 이유로 시골 개가 짖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지 못할 거라면 아예 화면에서 개를 빼면 되지 굳이 개를 넣은 이유는 뭘까? 사실, 이 화면에서 없어도 되는 건 개뿐만이 아니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방 안에 할머니 -화면상으로 성별 구분이 조금 어려운데 할머니로 추정한다- 한 분이 앉아 있는데 대사 한 마디 없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가만히 앉아 계신다. (최선의 연기를 하신 거겠지만 조연들까지 나오는 크레디트에서조차 이름을 찾지 못했다.) 감독이 원하는 대로 연기할 수 없는 개와 어떤 연기도 하지 않는 것 같은 할머니를 한 화면에 넣은 것은 감독이 당시 시골집의 저녁 풍경을 한눈에 보여 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루에서 전을 부쳐 먹는 엄마와 딸, 친구 집에 놀러 온 아이, 거기에 개와 노인까지 한 자리에 모여 있어야 비로소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80년대 시골집의 앞모습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병순을 놓치고 흩어졌던 세 형사는 골목에서 다시 만난다. 두만과 태윤이 병순을 놓친 데 대해 서로를 탓하며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시골 개가 짖는 소리는 마치 복식호흡이라도 배운 듯 우렁차다. 동네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시골형사 용구가 이를 놓치지 않고 담벼락에 올라서 도망치는 병순을 찾아낸다. 소현네 개에게 짖는 역할을 주지 않았던 감독은 이번 개에게 그 역할을 주어 형사들을 돕는다. 쉬고 있던 음악이 뛰기 시작하고, 걷고 있던 형사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엉거주춤 뛰어가는 병순의 뒷모습에서 점점 뒤로 빠지며 그를 쫓는 세 형사를 차례차례 한 명, 한 명, 또 한 명 보여 준다. 사람들을 다 보여 주었으니 컷이 끝나도 될 것 같은데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병순이 채석장으로 들어가며 화면에서 사라지고 세 형사의 모습도 작아질 때쯤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개는 형사들이 범인을 뛰따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기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형사들은 채석장에서 용의자 병순을 잡는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왕치, 흑염소, 시골 개들은 겨우 한 컷씩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맡은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개를 통해 인물들의 동선과 캐릭터를 만들었던 감독은 <살인의 추억>에서 이미지, 사운드, 의미, 상징 등 더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을 활용한다. 두 작품에 공통으로 나오는 개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플란다스의 개>의 도시 개들은 키우기 좋게 작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보고 짖기는커녕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살인의 추억>의 시골 개들은 낯선 사람을 보면 열심히 짖어야 하고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태윤이 소현네 집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큰 개 뒤로 작은 개 한 마리가 더 있다. 아마 그 개는 새끼일 것이다. 어미 개-부모견의 성별을 모르지만 새끼를 돌보는 것으로 보아 암컷으로 추정한다-는 낯선 태윤을 보고 짖지는 않았지만 새끼를 감싸려는 듯이 몸을 움직인다. 소현은 이 영화에서 마지막 살인사건의 희생자다. 어쩌면 어미 개의 행동이 태윤에게 소현이를 지키라고 말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겨운 추억 속 시골 풍경이 너무나 차갑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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