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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Dec 20. 2021

엄마 꼽사리 껴줘서 고마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이잖아. 속마음도 털어놓을 만큼이나!

소파에 앉아있던  나에게 큰 아이가 다가오더니 옆에 앉는다. 영화 한 편을 예매해 달라고 한다. 


"엄마, 이번 주말에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 예매 좀 부탁해."

"아 그래. 엄마도 그거 보고 싶었어!"


당연히 함께 가자는 말인 줄 알고 영화관 어플을 열다가, 별 반응이 없는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아이의 표정을 보니 웬걸.. 이게 아닌 것 같다.


"엄마랑 가는 거 아니야?"

"응. 나 xx랑 같이 보러 가기로 해서. 예매만 부탁한 건데."

"아. 그럼 엄마랑 준이도 같이 가도 돼?"


동생과 엄마도 함께 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우리 요즘 많이 친하잖아. 우리 제일 친한 사이 아니었니?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 개봉하면 같이 보기로 우리 약속했었잖아. 잊은 거니..?'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돈다.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같지만, 아이가 크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일이겠거니 합리화하며 그 마음을 외면해 본다.  




올해 14세, 이제 며칠 후면 15세가 되는 큰 아이와 거의 싸우지 않은 것 같아 스스로 뿌듯함이 들던 요즘이다. 살면서 누군가와 치열하고 사소하며 유치한 감정싸움을 했던 적이 거의 없는데, 유독 큰 아이와는 싸울 일이 많았다. 잔소리가 버릇이 되어버렸던 나에게 아이가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나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나의 잔소리가 백기를 들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내가 아이에게 내뱉었던 잔소리는 내 입장에서 답답하고 마음이 급해서 나갔지 정작 아이에게는 하나도 급한 것들이 아니었다. 학교에 늦을까 봐, 약속에 늦을까 봐, 숙제를 다 못해갈까 봐 나 혼자서 발까지 동동 구르며 잔소리를 쏟아냈었다. 느리지만, 결국에는 지각했던 적이나 숙제를 못해갔던 적이 거의 없는 아이였는데도 매번 나는 안심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다가 잔소리를 내뱉고 마는 날들이 많았다. 잔소리는 내뱉은 그 말로 끝나는 것이면 좋았겠지만,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지난 몇 년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삶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안 되는 일도 어떻게든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나였다. 그래서 애간장을 태워가며 애써야만 했었다. 

이제는 애쓰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엄마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느리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던 아이의 속도를 급한 나의 속도에 맞게 고치려고 애쓰던 버릇을 버렸다.  아이는 저 스스로의 속도에 맞춰 잘 살고 있었는데, 지난날에는 그게 왜 보이지 않았던 걸까?


하루는 24시간이다. 언제나 그랬다. 변하지 않고 일정한 24시간 중에서 잔소리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그 시간만큼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늘었다.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짤 이야기, 쇼미 더 머니 이야기, 친구 이야기에서부터 아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새는 아이와 수다 떨며 노는 것이 제일 재밌게 느껴졌다. 아이도 그렇게 느껴서였을까 요즘 들어 속 이야기도 종종 하더니 얼마 전에는 아빠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이 아빠가 갑작스럽게 하늘나라에 간 이후 2년간 아빠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아이였다.


"아빠가 미워. 짜증나."

"왜?"

"그냥 우리만 남겨두고 갔잖아."

"맞아. 엄마도 그럴 때 있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 같아. 보고 싶기도 하지?"

"응. 보고 싶지."


남편과 사별 후에  어른인 나도 아프고 공허한 그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했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는 얼마나 그 마음이 혼란스럽고 막막했을까. 어쩌면 그래서 아빠라는 단어 자체를 언급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제는 아빠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나와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꺼내기 어려운 마음속 깊은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자 뭉클함이 눈물샘에 신호를 보냈다. 눈물을 아이가 봤지만 닦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애써 이 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랑 간다고 해놓고는 미안한지, 아이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야. 우리 엄마가 영화 보러 가는데 꼽사리 낀다는데 껴줄까?"

"어머니 가시면 나도 좋지."

"엄마. xx가 같이 가도 된대."

"엄마 꼽사리 껴줘서 정말 고마워!"


이번에는 꼽사리 껴서 함께 영화 보러 가게 되었지만, 다음에는 눈치껏 빠져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엄마랑 조금만 더 놀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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