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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Dec 27. 2021

욕심낼 걸 그랬어(4)

마지막.

남자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간 여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와 보낸 시간을, 그와 시간을 보내며 가슴을 채웠던 그 감정들을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그 해 스무 살이었던 여자는 그동안 한 두 번 마음을 줬던 사람과 끝내 이뤄지지 않았기에, 마음을 주는 것에 겁을 내고 있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던 여자이지만, 남자와 마주한 순간 두려움 따위의 감정은 느낄 겨를도 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줘버린 상대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니, 여자는 기쁘면서도 뭉클한 것 같은 뭔지 모를 이 감정이 마음 가득 차올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켜 씻고 나오는데,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남자가 집에 도착했나 보다. 아직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춰보려 애쓰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집에 막 들어왔어."

"네. 오빠."


지난 며칠간 긴 시간 대화를 나눴음에도 밤늦게 시작된 통화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끊이지를 않고 이어졌다. 가족들이 집에 있었기에, 방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핸드폰을 얼굴에 바짝 갖다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남자 역시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톤에 맞춰, 함께 속삭이듯 말했다. 남녀 사이의 작은 속삭임은 은밀하고 온전하게 서로에게만  집중하도록 했다.




며칠 동안 여자와 남자는  밤새 통화하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만났다. 서로에게 더 깊이, 끝도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어느 날 오후였다. 강의실에 앉아 재무회계 수업을 듣고 있는 여자가 다른 날과 다르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온 신경이 주머니 속 자신의 오른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동으로 설정해 놓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남자가 통화를 마치기 전 망설임 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일 여자 친구 만나러 가. 만나서 정리하고 올게."

"네.."


잘하고 오라는 말을 할 수도, 잘 만나고 오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여자 친구를 정리하겠다는 그의 말을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반갑거나 기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에게 처음 전화를 걸던 날, 힘들고 무거웠던 그 감정이 다시 마음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 친구라는 사람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마음을 두드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두 가지의 감정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여자를  감쌌다. 


길게 느껴졌던 수업이 드디어 끝났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재빨리 꺼내 열었다. 남자로부터 메시지나 전화가 온 건 없었다. 진동이 울리지 않았으니,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건 알았지만 굳이 꺼내 열어 확인해 봤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자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자꾸만 뛰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니 열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설렘이라는 감정으로 기분 좋게 두근대던 마음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막연한 불안함으로 두근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자꾸만 뛰는 가슴이 그녀를 지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더 불안해져서, 생각이라는 것을 멈춰야 했다. 여자는 당장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찾지 못해, 잠을 청했다. 자꾸만 도망치려는 잠을 억지로 붙잡았다. 불안함을 넘어 괴로워하던 여자가 그렇게 겨우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자는 동안 해가 졌는지 방안이 깜깜했다. 열어보고 싶지만, 열어보고 싶지 않은 핸드폰을 열었다. 역시 남자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이번에는 한 방울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여자는 눈물로도 모자라 흐느끼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남자일 것 같았다. 온종일 기다렸던 그의 전화이지만, 이번에는 왠지 받고 싶지 않았다. 받으면, 마지막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이라고 해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나야."

"네.."


여자는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울었어?"


여자가 애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남자가 물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여자지만, 솔직하게 답했다.


"네.."

"왜 울었어."


남자는 울고 있던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에 가슴이 아파왔다. 울었다는 여자의 말에  울컥했다. 달래주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울었느냐고.


"..."


여자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도 마지막 인사일 것 같은, 남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서로의 말을 기다리며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대화 없이 핸드폰 속 통화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도 없이 이어지던 둘 사이에 처음으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남자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XX야.."


여자는 그가 들리지 않게 심호흡하고 대답했다.


"네"

"내가 오늘 여자 친구 만난다고 했잖아. 정리하고 오겠다고."

"네"

"정말 마지막으로 만나서 정리하려고 했어."


정리하려고 했다니.. 이어지는 말을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이미 마지막을 말하고 있는 남자였지만 여자는 그럼에도 남자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의 말에 답했다.


"네.."

"그런데 정리하지 못했어."

"네..."


여자는 남자와 끝내기가 싫었다. 그래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네'라는 대답만 하고 있었다.




여자를 처음 본 순간 반했다. 여자 친구와 싸우고 홧김에 나온 미팅이었지만,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녀를 만난 것에 기뻤다. 첫 만남부터 그녀에게 이끌렸다. 그녀에게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술만 왕창 마셔댔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술기운을 빌려 울었다. 그렇게 울고 그녀를 단념하려 했다. 하루 그렇게 울고 이제 다시는 그녀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날 밤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단념하려 했던 여자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 결심이 무너져 버렸다.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여자를 향한 이끌림에만 집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기까지, 온 정신이 온 마음이 이미 여자의 것이었다. 여자와 만날 수록, 대화를 나눌수록 더 빠져들었다. 그동안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이렇게 한 순간에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2년 넘게 만나온 여자 친구지만, 그래서 이미 여자에게 마음이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단번에 정리를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제대로 이별을 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만에 여자 친구에게 연락했다. 헤어지기 위해서였다. 여자를 향한 남자의 마음, 그리고 그로 인한 결심은 확고했다. 지난밤 여자에게 정리하고 오겠다는 말을 하던 순간에도 남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여자 친구는 그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주일간 서로 연락을 안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단호해 보이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제발 이 손을 놓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여자 친구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모습을 보여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둘 사이에 차곡차곡  쌓인 정, 함께 나눈 시간은 한순간에 손을 놓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이제 돌아보지 않고 여자에게 가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결심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자 친구를 만나고 나서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에 대한 확신의 호감과 여자 친구에 대한 정이 마음속에서 끝없이 충돌했다. 

남자는 나쁜 남자이기는 싫었나 보다. 환승 이별을 할 만큼 나쁜 놈이고 싶지는 않았다. 괴로워하다가 결심했다. 결국 그는 돌아서기로 했다.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자신을 기다렸던 여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녀에게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야만 했다. 눈물이 났다. 여자를 놓치기 싫었지만, 더 이상 나쁜 남자가 되기는 싫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에게 거는 마지막 전화였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을 알려야 했다. 정적을 깨고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가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마지막을 전하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팠지만, 욕심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자신에게로 오도록 설득하거나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돌아가겠다는 남자의 마음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가겠다는데 어떻게 붙잡겠어요.. 그동안 즐거웠어요."

"그래. 잘 지내. 나도 즐거웠어."


남자는 당장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재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서로를 향한 이끌림에 끌려 서로만 바라보며 달려온 일주일간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강한 이끌림이었지만, 짧은 만남이었기에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남자는 어렵게 돌아간 만큼 여자 친구에게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자꾸만 그녀 생각이 났다. 이따금씩 여자 생각이 나고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욕심내지 않고 기꺼이 그를 보내줬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여자는 마음이 아팠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내려야 했던 날도 많았다. 자꾸만 눈물이 났고, 눈물을 겨우 닦아내도 결국에는 소리 내어 울음이 터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이렇게 아플 거였으면.. 욕심낼 걸 그랬어..'


         

욕심낼 걸 그랬어... 

.

.

.

.

.

결국에는 이뤄지지 않은.. 그들의 이끌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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