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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Jan 16. 2022

우리 아이가 빵점 맞았어요.

내 아이가 빵점을 맞았다니...

우리 아이가 빵점을 맞았다. 이것은 한 치의 거짓이나 과장을 보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 그러니까 실화이다.

아이가 다니는 수학학원에서는 매 시간 시험을 본다. 언제나 학원 수업을 마치면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큰 아이가 며칠 전, 학원 마치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오늘 시험 진짜 대박 어려웠어. 그런데 내가 엄청 열심히 풀어서 그래도 70점은 맞을 것 같아."

"오 그래? 잘했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최고!"


아이의 말에 쿵작을 맞춰줬다. 막상 시험 점수가 나오면 계산 실수라는 핑계를 대지만, 언제나 핸드폰 너머로 자신만만했던 아이의 이야기와 달리 예상보다 점수가 낮게 나오곤 했기에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던 아이가 핸드폰을 들고 달려왔다.


"엄마. 대박."

"왜?"

"선생님한테 카톡 왔는데.. 나 빵점이래."

"헐? 정말로?"

"응."


빵점을 맞았다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많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아이만큼 당황스러웠고 걱정스러웠지만,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시험 문제가 엄청 많이 정말로 심하게 어려웠나 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 했지만, 꿀꺽 삼켜 버렸다. 잔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카톡으로 이어진 학원 선생님께서 대신해주신 것 같았다.


빵점의 충격으로 밤늦도록 유튜브 삼매경에 자라고 해도 안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녀석이 그날에는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내 아이가 빵점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빵점은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걱정하는 삶이 힘겨워 이제는 걱정을 최대한 외면하는 삶을 살고자 애쓰고 있었는데, 아이가 빵점을 맞았다는 그날만큼은 걱정이 외면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옆에 누워 잠든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중학생이 되었음에도 잘 때는 새근새근 세상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사춘기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저 나름의 느긋한 속도로 가고 있는 아이가 학원 시험을 볼 때마다 자신의 예상이나 기대와 달리 낮은 점수를 받으면서도 좌절하거나 침울해하지 않고 늘 당당하고 밝게 지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라고 며칠 째 세수도 하지 않아 꼬질한 아이의 볼에 뽀뽀를 했다. 아이가 태어났던 그날, 세상에 나와 응애 하고 울음이 터진 아이를 내 품에 안았던 그 순간의 뭉클함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씩씩하고 밝게 내 곁에 있잖아.'


순간적으로 느껴진 뭉클함이 내 머릿속 가슴속 걱정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사함이 채워졌다.




내가 딱 아이 만했을 때에, 내가 받아온 첫 시험 점수에 실망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잠결에 본 이후로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 것 같다. 명확하거나 객관적인 기준이 없이, 그저 최고가 아니면 실패라는 나만의 기준을 정했다. 사소한 일조차 원하는 기준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을 실패라 여기며 힘들어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실패하면 괴로워했다. 삼십 년 넘는 나의 인생을 완벽주의에 스스로 가둬 괴롭혀왔다. 실패를 겁내고 피하려고만 하다 보니 제대로 실패하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실패나 좌절은 삶에 있어 당연한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가 빵점을 맞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걱정되었다. 기대와 달리 자꾸만 낮은 점수를 받아오는 아이가 걱정되지 않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느꼈던 뭉클함이, 감사함이 생각의 전환을 주었다. 실패하고 좌절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에 무뎌질 것이고 살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실패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인생은 어쩌면 성공보다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생각될 만큼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크고 작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속도로 간다면,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되든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갈  있지 않을까.


아이가 제대로 실패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지한 이야기나 잔소리의 향기를 풍기는 이야기는 한 마디라도 내뱉으면 짜증 내는 춘기 소년에게 어떻게 엄마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걱정하지 말라고, 나름의 속도로 잘하고 있다고 꼭 이야기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엄마는 얼마 전까지 실패하면 큰 일어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살다 보니까, 실패하는 삶이 당연한 삶이더라고. 엄마는 그걸 얼마 전에 알아서 사십 년 가까이 엄청 힘들었거든.. 네 점수가 기대보다 나오지 않는 이런 실패들을 아프지 않게 잘 받아들이고 지금처럼 씩씩하게 너만의 속도로 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


나의 말이 잔소리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기를 소망해본다.




"멋지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첫째 아들의 사생활을 본의 아니게,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자꾸만 오픈하게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혹시 나중에 네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엄마 용서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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