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래성 회복, 그 시작은 ‘자각’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 '치유'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힐링, 웰니스, 웰빙, 멘탈 케어.
수많은 프로그램과 서비스가 치유를 표방한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란 무엇인가?
단순히 아픈 곳을 낫게 하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전부일까?
10년간의 치유 현장 경험과 개인적 여정을 통해 나는 하나의 확신에 이르렀다.
치유는 단순히 병의 회복이 아니라, 존재의 균형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단순한 치료나 일시적 위로로 이해한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마음이 힘들면 상담을 받거나 휴식을 취한다.
물론 이런 접근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증상이 완화되거나 잠시 기분이 나아질 수는 있어도, 똑같은 패턴과 문제가 반복된다.
진정한 치유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명확하다.
치유를 깊이 받아들인 순간은 고통의 구속에서 자유를 느끼게 되는 때다.
더 이상 과거의 상처와 패턴, 고착된 기준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이 예전에 느꼈던 불편함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균형을 되찾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먼저 '존재'를 이해해야 한다.
존재를 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 수많은 도구들에 관심을 갖는다.
MBTI, 에니어그램, 휴먼 디자인, 사주명리학.
예전에는 혈액형 같은 단순한 도구로도 자신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점을 보거나 사주를 보는 것도 모두 나를 알고 이해하고 싶은, 그리고 존중받고 싶은 내면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자기가 자라온 배경과 경험한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 접근과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아차리고, 그렇게 형성된 나를 이해할 때 비로소 다른 누구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존재를 이해한 다음에는 균형을 잡는 일이 필요하다.
균형이란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자기 안의 중심이 있다는 뜻이다.
이를 축품대지(軸品大志)로 설명 한다.
축은 중심축, 품은 큰 그릇, 대는 기세, 지는 지혜를 의미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치유와 회복, 이해를 거쳐가면서 경험의 양 극단 사이에서 중용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양극단 사이의 거리가 클수록 더 큰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
그래서 방황조차도 결국 재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심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과 자기 스스로 세운 것이 함께 존재한다.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타인의 철학이나 종교적 신념 같은 것들이고, 자기 스스로 세운 것은 무수한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균형력을 잃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가장 먼저 의심하는 상태가 된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믿음과 확신, 신뢰가 없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는 신호다.
두려움이 압도하면 늘 불안하고, 이런 사람들은 '걱정 인형'이 되어 조종당하기 쉽다.
호흡이 얕고 감정적 동요가 크며, 외부 정보와 타인의 말에 쉽게 휩쓸린다.
끊임없이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고, 자기만족과 감사함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런 상태는 마치 신체의 균형력을 잃어 넘어지는 것과 같다.
계속 균형력을 잃으면 병에 걸리듯, 마음의 균형력을 잃으면 사소한 고통들이 누적되어 결국 마음의 병이 되고, 이는 다시 몸의 병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되찾는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원래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이 있었는가? 무결했던 내가 있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멀어졌을 뿐이다.
치유의 여정이란 그저 내가 되는 길이다.
다른 누가 아닌, 진짜 자기 자신이 되는 길 말이다.
구체적으로 존재의 균형을 되찾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단단함을 세우는 일이다.
분별 없는 마음,
이것을 옳다 저것을 그르다 하는 이분법적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자기 이해에서 나오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
자신과 세상을 보는 통찰력,
모든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가벼움,
언제든 숨 쉬고 춤출 수 있는 여유로움,
자기가 선택한 무게에는 책임지는 자세,
유연한 사고 구조,
감사하는 마음과 내면의 자족감.
이런 것들이 진정한 균형의 요소들이다.
나는 한 초등학생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런 자기 탐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아이가 내 모든 말에 "왜요?"라고 질문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살아왔는지 통렬히 깨달았다.
그때부터 내 모든 생각과 행동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진정한 자기 탐구의 시작이었다.
치유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결국 이 세상에서 존재 전체로서 무조건적인 수용을 받지 못한 경험들을 갖고 있다.
공동체의 가치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세상이 된 현실에서, 치유가 지향해야 할 것은 스스로 자기 안에서 그런 무조건적인 수용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런 치유의 과정에서 자연과의 연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말과 교감하는 승마를 통해, 그리고 프리다이빙을 통해 자연과의 깊은 연결을 경험했다.
한겨울 승마 후 말의 체온을 느꼈을 때의 감동, 수십 미터 바닷속에서 수압을 강한 포옹으로 느꼈을 때의 사랑받는 느낌.
이런 경험들은 모두 치유적 시선과 언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정한 치유는 직면, 위로, 해소, 이해, 용서, 자각, 자유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과 주목이다.
모든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 욕구이자, 치유의 핵심 요소다.
나는 이 과정을 구덩이의 비유로 설명하곤 한다.
처음에는 계속 같은 구덩이에 빠진다.
그러나 자각이 일어나면 빠져도 다시 나올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구덩이를 피해 지나갈 수 있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아예 구덩이 쪽으로 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된다.
재평가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것을 깊이 깨달았다.
과거에 있었던 나의 고착된 패턴이 재평가되면서 "더 이상 그럴 일이 아니네"라는 다른 인식이 온다.
그러면 늘 하던 패턴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그때부터 가벼워지는 거다.
힘 빼고 숨 쉬듯이 가볍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경청과 주목은 심리상담의 가장 기본 소양이다.
수많은 스킬과 지식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경청과 주목이라는 것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내와 자기를 비우는 마음, 그리고 타인에 대한 긍휼함과 자비심, 이해심 같은 것이 기반으로 되어야 한다.
날카로운 직관력도 중요하고 꿰뚫어 보는 통찰력도 필요하지만, 그것도 경청과 주목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속빈 꽹과리 소리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치유를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각, 이해, 이완, 쉼 같은 요소들을 적시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양질의 프로그램과 체험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것이 상술로 흘러가지 않도록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 치유 시장에는 마케팅 용어만 갖다 붙인 천차만별의 프로그램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 시장이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치유의 본질과 깊이를 담보하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치유가 일어났을 때의 느낌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자족감이다.
실제로는 많이 가졌든 아니든, 정신적 자유로 인해 완전한 만족을 느끼는 상태다.
더 많이 가져야, 더 멋있어져야, 더 인정받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조건부 사랑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치유를 절실히 원한다는것은 자유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를 가져야 나머지 요소들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그건 절반의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은 정신적인 자유가 본질이다.
정신적인 자유를 위해서 그 수단으로 경제적 자유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정신적인 자유를 아주 갖고 누리고 있다면 경제적 자유도 필요한 만큼 선택적으로 취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치유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을 되찾는 과정이다.
무결했던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길, 다른 누가 아닌 진짜 나 자신이 되는 길, 그것이 바로 치유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런 치유를 경험한 사람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사랑이자 치유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