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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작자 Dec 13. 2022

네,  또  이직 하려고 합니다

퇴사일기

어제는 일요일 저녁이었고 예전 회사 동료와 선배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 나도 모르게 최애로 이직하고 싶었던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채용 지원을 해버렸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로 부터 영향을 잘 받는 편이다. 어제 만난 4살 어린 옛 동료이자 친구인 그녀와 나눈 대화와 그녀가 전해 준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히 문구가 내 노트북 안에 있던 이력서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이제 이력서는 내 손을 떠났다.

그녀는 이직을 고민하는 내게 자신을 믿으라며 말해 주었고 카드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진리를 섬으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오늘은 재택근무가 아닌 출근을 하는 날이였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평소처럼 동료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든 채 엘레베이를 타고 회사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와서 내 자리로 걸어가는 중에  익숙하지만 저장되어 있지는 않은 전화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지원한 회사의 채용팀이었다. 두어번 전화를 해본 번호라 익숙하였는지 자연스럽게 회사에 있는 phone room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년에도 이 회사에 이력서를 냈었다. 그때는 지원한 부서가 아니기도 했고 디폴트되어 있는 외근 횟수(1달에 8번)에 겁이 나서  면접 자체를 포기했었다. 올해 9월 똑같은 담당자에게서 문자가 왔었고 지원 의사가 있는지 물어봤었다. 그때 역시 22년 1월에 이직한 회사에서 1년이 채 안되었고 내부 점검(Audit)을 받은 지 얼마 안되서 면접을 볼 여력이 없었다. 다음 기회를 약속하며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10월 말쯤 최근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친한 동료가 이직을 할 예정이라고 내게 직접 말해 주었다. 그는 내가 면접을 보지 않았던 위에서 말한 그 회사에 붙었다며 자신의 높아진 연봉도 말해 주었다.

현재의 나보다 많이 받게 될 미래의 그의 월급에 질투가 나면서도 관리자와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던 그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와 다른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평소처럼 잘 맞는 사람끼리 화기애애한 점심식사시간 이었다. 퇴사 기념으로 내가 그의 밥을 사주었다. 밥을 먹고 다른 동료는 미팅이 있어 일찍 들어가게 되었고 나와 그는 카페에서 시즌한정 메뉴를 마시며 이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꽤나 솔직히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털어 놓았다. 1월에 입사해서 12월이 되니 회사나 업무적인 부분이 이제 좀 안정이 되었고 업무 상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제 큰 스트레스가 되지 않아서 여기에 안주하고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작년에 이직할 때 세운 조건 (1.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곳인가, 2. 성장할 수 있는 곳인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 회사에 대한 권태와 내 커리어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그가 가게될 그 회사,이력서에 회사이름이 써있는 자체로 강조효과가 있을 그 회사에 지원할 뻔 했었던 이야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도 Refer(직원의 추천)로 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입사하게 되면 refer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나를 이 정도 까지 생각해 주는지는 몰랐는데 고마웠고 내 귀는 잠깐 팔랑였다. 그날 이후 마음속은 거의 혼란과 변덕의 카오스였다. 경력으로 치면 내가 3년은 더 오래 되었는데 그가 이제 나보다 더 높은 연봉이 된다는 사실이 조금 분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회사에 적응하는 시기에 친절하게 먼저 알려주고 점심도 같이 먹자고 해준 그에게는 고마운 마음도 분명 있었다. 어쨋거나 마음 한켠에서 나도 더 받을 가치가 있는데 라는 깃발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력서, 내가 일하는 업계에서는 CV(Curriculum Vitae)라고 불리운다.

새벽 3시 40분 경, CV를 2022년 버전으로 최종 수정하고 어제 내가 취중지원한 회사 채용 담당자에게 파일을 이메일로 보냈다. 오늘 낮에 전화로 홈페이지 상에서 입력한 사항은 작년에 이어 업데이트가 되었는데 CV파일은 2021년이 첨부되어 있어 2022년 것으로 수정하거나 파일을 보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CV 워드 파일을 열고 최근 진행한 단기 업무 한 가지가 생각나서 추가로 업데이트 하고 보내려고 했는데 어제는 완벽해 보였던 CV에 꽤나 많은 문서상 결점이 보여서 문구, 바닥글, 표, 글씨크기, 글머리 기호, 간격까지 수정하고 PDF로 저장을 했다. 깔끔해진 CV를 노트북 바탕화면에 그냥 두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려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폴더 명은 "My adorable CV"

소중한 CV파일을 폴더에 넣어 두니 뭔가 좋은 집을 만들어 준 것 처럼 이제 안심이 된다.


CV를 수정하기 전까지 내 마음과 머릿 속은 쿵덕 거렸다. 아이를 재우고 자정 전에 CV를 수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잠이 들었다가 새벽 2시 반 쯤 정신이 들었다. 뇌는 깼지만 눈을 감은 채 몇 십분간 누워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지금 회사에 머무는 나와 이직한 내가 시소에 타고 있었다.


비슷하게 혹은 좀 더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자나, 쿵

지금 단계에서 레벨업을 하려면 큰 회사 경력은 있어야지, 쿵

사실 해보고 싶자나 안하면 후회할 거 같자나, 쿵

다른 후배며 동료들도 그 회사에서 잘 살고 있자나 나라고 못할까, 쿵


이직한 내가 앉은 자리의 시소 쪽에 점점 큰 무게가 실리면서 요 근래 읽었던 '역행자' 라는 책의 내용이 퍼뜩 떠올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책상앞에 앉았다.


그랬다. 이번에도 또 내 유전자가 오작동 하는 바람에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가로 막고 있던 것이다. 그 사이에서 진화하려는 현재의 나는 이렇다할 소득도 없이 고민과 갈등으로 쿵덕거리며 한달을 살았던 것이다.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은 기회비용을 치루더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큰 회사에 가서 이제 조금 좋아지기 시작한 CRA(Clinical Research Associate)라는 업에 두 다리를 무릎까지 담구고 뭐라도 잡아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면접준비에 대한 걱정과 새로운 환경과 인간에 적응이라는 큰 스트레스를 겪더라도 나는 도파민을 얻고 싶은 사람이었다. 자랑스럽게 회사 로고가 찍힌 바인더를 보이면서 모니터링 실에서 일하고 싶고, 업무 상 전화를 할 때도 유명한 그 회사의 이름을 대며 OOOOO의 OOO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역행자'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는 유전자의 오작동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실행하는 것을 망설이도록 진화했다. 유전자는 내가 (유튜브) 하는 것을 막으려 오만 가지 망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유전자의 오작동일뿐이다. (유튜브)를 하려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망상에 시달릴 것이다. 지금 시작하면 100명 중 90등으로 늦게 출발하는 거라는 착각은 오작동일 뿐이다. 인간은 모두 심리적 오류에 시달린다. 하지만 100명 중 1등은 타고난 실행력을 가진 사람일 것이고 이사람은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지금이라도 (유튜브)를 시작한다면, 100명 중 2등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절대 늦은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유전자 오작동에 시달리고 있을 때가 오히려 기회다. "


나의 경우는 유튜브가 아니라 '이직' 이었을 뿐 저자가 망설인 이유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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