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늙은 개는 슈퍼 앞에 있다. 슈퍼 앞에는 개집이 있고, 개집 안에는 늙은 개가 있다.
늙은 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목줄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목줄이 개집에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개집 채로 끌고서 가출을 했던 적도 있다. 집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슈퍼 앞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보고 싶었다.
그 시절, 늙은 개는 가출을 했었다. 견생 단 한 번의 일탈.
바다를 향해 뛰었다. 이윽고, 다다른 곳은 바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늙은 개가 다다른 곳은 한강이었다.
다행인 것은 해가 중천에 뜨자마자, 헥헥대며, 숨을 헐떡이는,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끝이 보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에 엎어져 있는,
늙은 개는 지금도 그때 본 것이 바다라고 믿는다.
이렇게 뜨거운 여름날이면, 늙은 개는 떠올린다. 오랜 고생 끝에 다다른 곳에서 온몸 가득 느꼈던 자유의 감촉.
앞발이 바닷물에 닿았을 때의 시원한 감촉. 철벅 철벅 바닷물을 뛰어다녔었다.
늙은 개가 아직 늙은 개가 아닐 때, 힘이 세고, 덩치도 더 크고, 발톱도 더 단단하고 날카로웠을 때,
온 힘을 다해 개 집 채로 끌고 뛰쳐나갔었다. 지금은 비록 슈퍼 앞에서 한 발도 못 움직이고 헥헥헥 숨을 몰아 쉬고 있지만,
여름이다. 뜨겁다.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시야를 흔든다.
뿌옇게 번지는 시야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풍덩.
빠지고 싶다. 바로 저기 바다가 있다. 늙은 개는 자유형은 못해도, 배영은 못해도, 개헤엄은 자신 있다.
그때도 멋지게 개헤엄을 쳤다. 자신 있었으니까, 자신 있었는데, 물밑으로 꼬르르,
가라앉았다. 목줄 때문이다. 목줄에 매달린 개집 때문이다.
하마터면, 개죽음당할 뻔했다고,
한편으로는 개죽음당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지나가는 불법 낚시꾼 아저씨가 낚싯대를 던져 구해주었다.)
왜냐하면 지금, 늙은 개는 슈퍼 앞에 있기 때문이다. 다 늙어서 개집을 끌고 달릴 힘이 없기 때문이다.
툭.
슈퍼 할머니다. 양철로 된 개밥그릇에 밥 한 덩이를 던져준다. 비빔밥에 가까운 개밥이다. 허연 밥에, 된장찌개에, 시금치까지. 늙은 개는 사료보다 개밥을 더 좋아한다. 떠날 수 없는 이유 중에는 개밥도 한 몫했다. 한 번 맛보면 이 맛을 떠날 수 없다. 할머니는 한 번도 늙은 개의 끼니를 미루거나,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본인의 밥을 잊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늙은 개와 함께 항상 거기서, 평생 때되면 밥 먹고, 부채질하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개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슈퍼 할머니가 먼저 죽을 수도 있고, 늙은 개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 조만간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이다. 늙을 만큼 늙었으니까. 지칠 만큼 지쳤으니까.
늙은 개가 개처럼 개밥을 먹는다. 개같이 배가 고팠다. 개같이 먹고 있는데, 슈퍼 할머니가 오래된 양산을 꺼낸다. 먼지가,
후둑, 떨어진다.
할머니는 양산을 편다. 오랜 잠을 자고 일어나듯, 낡은 양산이 기지개를 핀다.
푸드덕, 흙먼지가 날린다.
늘어진 피부와 앙상한 뼈, 바람이 불면 날아갈지도 모르는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양산을 피고, 총총총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