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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Aug 15. 2023

[초단편소설] 감사

어느 고객센터 직원의 하루

감사라는 말이 넘쳐난다. 고객님 감사합니다 에서, 이제는 고객님 사랑합니다 까지.

감사에는 감사할 무언가가 선행해야 한다. 감사는 그에 대한 피드백이다. 행위이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의 포화 속에서 감사는 행위 이상의 가치를 잃는다.

오늘도 사람들은 남발한다, 난봉꾼처럼.


고객님.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씨발. 뭐가 감사해. 그래서 환불해 줄 거야, 말 거야.


고객님 양해 부탁드립니다. 회사 정책상 환불은 어려우시고요. 대신 새 상품으로 교환 도움 드려도 될까요?


씨발. 내 말을 뭐로 알아들은 거야.

고객님, 고객님의 소중한 말씀 감사드리지만, 환불하기 어려운 점 깊이 사과드려요.

아니, 감사고 나발이고, 환불이나 해달라고.

고객님. 고객님...


한참 실랑이를 더 벌인다. 그녀는 가끔 딴짓하며, 죄송하다 말하고, 웃지도 않고, 감사하다 말하고, 가끔은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고 그러다, 그녀는 곡을 하듯이, 고객님, 고객님을 읊조리다,

고개를 숙인다.


퇴근. 회사에서 나와 서울대입구로 향하는 지선 버스를 탄다. 버스는 곡예를 하듯이, 이리 휘영청, 저리 휘영청 비틀거린다. 중간에 그녀는 마을버스로 한 번 갈아타고 봉천 고개를 넘어, 고개 길 사이로 난 좁은 길에서 내린다.


오늘도 집 바로 앞 골목 가로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둠에 몸을 숨긴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찰칵, 찰칵, 라이터를 켠다. 부싯돌이 부딪치고, 불꽃이 튄다. 찰칵찰칵,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듯, 어둠을 밝힌다.

순간 밝아질 때, 미간을 찡그다.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붉은 불이 살아난다. 한숨처럼, 깊이 숨을 내 쉰다. 하얀 연기가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그녀의 숨소리와 담배 연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하늘로 말려 올라간다.


어둠 속에 담배 불빛이 사라지고, 그녀의 한숨도 사라지고,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꺼진 가로등 아래 그곳엔 어둠밖에.

심지어 어둠조차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까맣게.


집에 들어간 그녀를 세상은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밥을 먹을 수도, 밥에 소주 한 잔을 할 수도,

소주 한 잔에, 깍두기를 베어 먹을 수도,  그게 아니면, 라면을 먹을 수도,

이것도 아니라면, 그저 침대 위에 내장 흘러내린 시체처럼 누워 이불을 덮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고객님도, 고갯길도, 휘영청 곡예를 하던 버스도, 고개 길 사이로 난 좁은 길도, 꺼진 가로등도.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문이 다시 열린다. 아침이 밝아와 비로소 그 문의 색이 보인다. 파란색이다.


그녀는 붉은색 목도리를 하고, 까만색 코트를 입었다. 그래도 추운지 연신 발을 동동 구른다. 숨을 쉬면, 하얀 실타래처럼 입김이 헝클어진다. 그리고 또 그녀는 분홍빛이 도는 벙어리장갑을 끼었다.  그리고 또 그녀는 추운지 양 볼에 가득 홍조를 띠었다. 홍조 때문인지, 그녀는 몹시 앳되보인다.


앳되보이는데도, 그녀는 파란 문이 달린 집을 나와 고갯길 사이로 난 좁은 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봉천 고개를 넘어, 서울대입구로 가서, 회사로 가는 지선 버스를 탄다. 그리고 회사 앞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의 11층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는다.

시계의 바늘이 아홉 시를 가리키고,

전화벨이 울린다.

따르릉.


다시 하루 시작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감사합니다.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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