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 나는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왔다. 책은 계속 읽었지만 손으로 가득 담아 올린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난 금세 읽었던 책들을 잊어버렸다. 그런 내가 2008년 J.M. 쿳시의 <추락>을 읽고 이 책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추락>에 대한 독서후기가 십 년 넘게 해온 블로그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바이런>
<추락>의 작중 인물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사회적인 몰락을 겪고서도 바이런에 대한 저술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추락>을 읽으며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침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로맹 가리가 자신의 문학을 통해 추구했던 불가침의 영역이 '인간에 대한 존엄'이었다면 <추락>의 루리 교수에게는 '바이런'으로 상징되는 '자존감'이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런 면에서 로맹 가리가 문학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실체화해내고 있다면 J.M. 쿳시는 바로 자존감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통해 만들어나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J.M. 쿳시는 1940년 네덜란드계 백인 아버지와 폴란드계 독일 이민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태어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소수의 영국인과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백인 이민자들 그리고 다수의 유색인종이 혼재된 국가이다. 인종의 혼재만큼이나 종교와 인종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남아공에 태어난 J.M. 쿳시의 자전소설인
<소년 시절>을 읽으며 나는 소설가 쿳시를 만들어 낸 그의 어린 시절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거짓말쟁이다. 그리고 무정하다.
전반적으로 세상 사람들한테는 거짓말쟁이고, 어머니에게는 무정하다.
그는 자신이 점점 어머니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약해지지 않을 작정이다. ] P57
변호사이지만 가장으로서는 무능력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어머니를 향해 어린 쿳시는 어머니에게는 집착과 애정을 느끼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영화 <기생충>의 포스터 속에서 부유한 계층인 박사장 가족은 신발을 신고 있지만 빈곤층인 기택의 가족들은 맨발이다. 쿳시의 자전 소설 <소년 시절> 속에서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맨발이다. 신발을 신고 다니고 아프리칸스어 대신 영어를 쓰지만 '쿳시'라는 아프리칸스 성을 지닌 소년 쿳시는 영국인들로 구성된 반에서
언제든 아프리카너 아이들 반으로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들에게, 그와 그의 어머니에게 명백해지는 것은
케이프타운에서는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학교에 간다는 사실이다. ] p213
["그들에게 총을 만지라고 하면 안 된단다.
그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
안 되다니! 왜 안된다는 걸까?
아무도 그에게 말해주지 않으려 한다.
그는 안 된다 mustn't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는 그 말을 다른 곳에서보다 농장에서 더 자주 듣는다. ] p144
태생은 아프리칸스이지만 영어를 쓰는 소년 쿳시가 갖는 사회적 계급의 모호함은 쿳시를 '이방인'으로 만든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쿳시는 자신의 괴리감을 표출하고 싶은 열망을 키워왔다. 꾀병을 부려 침대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나는 이미 쿳시가 소설가가 되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농장의 소유야!~ 농장은 그들 중 누구보다 위대하다.
농장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한다.
~농장의 소유라는 것은 그의 비밀스러운 운명이다.
그는 그 운명 속에 태어났고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둘이다. 두 번 태어났기 때문다.
한 번은 여자한테서, 또 한 번은 농장한테서.
어머니는 둘이지만 아버지는 없다. ] p 153~154
2003년 <추락>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영광을 돌렸다. J.M. 쿳시의 자전 소설인 <소년 시절>의 대부분은 작가 자신보다는 어머니에 집중되어 있다. 무능력한 아버지 대신 절망적인 현실을 짊어진 채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쿳시의 어머니는 작가 로맹 가리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어머니의 부서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속에 자라남을 느꼈다.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새벽의 약속> P46
[어머니의 행동에는 그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는 굉장한 무언가가 있다.
새롭고 쓰라린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그녀는 점점 더 강해지고 더 완강해지는 것 같다.
마치 그녀가 다른 목적 없이,
그저 세상 사람들한테 자신이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 같다. ] p246
로맹 가리가 <새벽의 약속>을 통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썼던 것처럼 어쩌면 쿳시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소년 시절>을 썼는지도 모른다. <추락>의 루리 교수가 '브람스'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소년 쿳시는 농장을 어머니처럼 동경해 왔다.
["난 당신이 이 개를 한 주 더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개를 단념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단념하는 거요."] <추락> p331
[그는 양들이 왜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는지,
왜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맞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주 세세한 것까지 모두 알고 있지만,
체념하고 만다.
그들은 이미 그 값을 계산해봤고 그걸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값, 살아 있음에 대한 값. ] p162
아끼던 반려견을 안락사시키는 <추락>의 루리 교수의 심리를 나는 <소년 시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태생적 이유로 인한 불안정한 계급의식과 아버지에게서
느끼는 어찌할 수 없는 혈육에 대한 반감이 가져오는 양가감정은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도축되는 '양'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소년 쿳시에게 어떠한 질문을 심어놓았다.
바로 그 <이 땅에 존재하는 값, 살아 있음에 대한 값>에 대한 질문의 답이 그의 소설임을 나는 <소년 시절>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땅에 심은 작물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서야 그 열매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식물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소년 시절>을 통해 나는 쿳시의 작품을 키워낸 농장을 체험한 듯하다. 이제 나는
J.M. 쿳시를 만나기 위한 출발선에 다시 섰다. 그의 책을 이제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