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신이 있다면........

#어느날우리집현관으로멸망이들어왔다#드라마 #호야 #신

by 묭롶

요즘 내가 빠져있는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6화에서 소녀 신이 가지고 있는

화분에 궁금증을 갖는 동경과의 대화 장면을 보면서 5년 전에 만난 호야(식물)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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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5년째 살고 있는 호야>


화분은 뭐냐고 묻는 동경이에게

싹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피긴 피는 건지 핀다면 뭐가 피는 건지"

"그럼 이상한 게 나오면?"

"뽑아야죠 괜찮아요 다시 심으면 되니까"

"이건 제 거거든요"



"그럼 좋은 게 피었으면 좋겠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꽤 공들이고 기다린 거거든요 처음 심어 본 거라"






내가 호야를 처음 만난 건 내가 근무하는 직장의 근무지를 근교로 발령을 받고 난 5년 전이었다. 낯선 사무실의 낯선 내 자리에 도착했을 때 호야는 나의 전임자가 키우던 식물이었다. 종이컵보다 겨우 조금 더 큰

작은 화분에서 치열하게 삶을 지키고 있는 호야를 처음 만났을 때 난 나의 전임자보다 이 친구가 이 구역의 선임임을 깨닫게 되었다.


작은 화분에서의 고군분투가 그대로 느껴지는 호야는 거의 매분 매초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는 치열함이

그 내뻗은 자그마한 줄기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내비쳐졌다. 나는 새로운 자리에서의 업무를 정리하기도

전에 퇴근하자마자 호야를 데리고 집 근처 화분 집에 갔다. 이 작은 호야가 그 작은 화분 속에서 뻗어나가느라 이리저리 뻗은 뿌리들로 가득 차서 기존의 화분을 깨서 옮겨 심어야 할 정도로 화분 안에는 흙 대신 호야의 뿌리로 가득했다. (애는 도대체 그동안 뭘 먹고 살았을까?)


그 작은 화분 안에서의 식물의 몸부림이 꼭 내 모습만 같아서 나는 그날 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의 들어왔다>에서 소녀 신은 꽤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화분에서 싹이 돋은 식물이 맘에 들지 않으면 뽑고 다시 심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절대 그 싹이 난 식물을

뽑지 못할 거란 걸............


새로운 화분에 자리를 잡은 호야는 이파리와 줄기가 통통해졌다. 줄기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뻗어가며 집에 있는 다른 식물들을 감기도 하고 그 줄기에 꽃이 피기도 했다. 어떨 땐 뻗었던 줄기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말라버리기도 했지만 이내 다른 줄기로 또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는 호야를 5년 동안 지켜보면서 나는 이 친구가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p9 <데미안>



매 순간 치열하게 삶을 사는 호야를 지켜보노라면 신이 과연 있다손 치더라도 이 식물의 생사에 과연 관여할만한 권한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나름으로 이 식물은 제자신의 우주를 스스로 형성하고 운영하며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거기에 뭐를 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에 역할이 있다면 그저 나처럼 호야의 뻗어나가는 줄기가 마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기를 응원하는 것이 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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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찾아왔다>에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멸망을 기다리던 동경은 그와의 약속을 상징하는 팔찌를 스스로 끊음으로써 그를 되찾았다. 하지만 내가 신을 필요로 하며 나의 동맥을

노려보던 그 순간에도 드라마처럼 신은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까지 그때의 흉터를 지닌 채 지금을

살아간다.

어쩌면 삶의 어느 순간 나는 신에게 너무 많은 부분을 기대했기에 큰 실망을 했는지도 모른다. 기대를 하기엔 나의 노력은 내 친구 호야에 미치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호야는 앞으로도 또 몇 번의 꽃을 피워낼지 모른다. 어쩌면 이 친구는 자신이 피워내는 초콜릿향 꽃내음으로 묵묵히 나를 응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줄기를 뻗어나가는 호야를 보면 또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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