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화 같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섬에있는서점 #개브리얼제빈 #책 #소설 #문학동네

by 묭롶

어린 시절 글자를 깨우친 이후로 내게 동화책은 친구였다. 해 질 녘이면 나는 노을이 지는 창가에 앉아 혼자서 어스름이 내려앉아 방 안이 어두워질 때까지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어두워져 점점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면 내 귓가에 동화의 내용을 알려주던 친구가 내게 잘 자라고 내일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이 어려워진 이후로는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간 후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는 학교에서 나눠주는 교과서 외에는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한 권씩 학급문고용 책을 제출하라고 선생님이 얘길 하셨지만 난 가져갈 책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학급문고에서 李箱의 소설 [날개]를 만났던 봄날의 오후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무 춥고 무섭고 아파서 눈도 뜨고 싶지 않던 그 시절 나는 [날개]를 읽는 동안 따뜻한 아랫목에 앉은 고양이처럼 나른하고 졸리고 따스했다.

소설책을 읽고 있노라면 내 말을 들어줄 누구 하나 없었지만 왠지 공감받고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학급문고에 놓인 책을 다 읽고도 나는 교과서 대신 소설책이 읽고 싶었다. 물론 돈은 학교에 타고 올 버스비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었다. 분류별로 작가별로 책을 배치하고 서가를 관리하고 남은 시간 내내 책을 읽을 수 있는 내 소망에 가장 부합하는 직업은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지만 집과 학교는 나에게 엄마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도록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그것도 빠른 시간에.......


우리 딸아이가 글자를 배워 내게 동화책을 읽어달라며 가져올 때면 나는 마지못해 동화책을 읽어주면서도 동화가 얘기하는 거짓된 행복에 화가 났다. 중년이 넘은 내게 동화책은 어린 시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산타할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학대받던 신데렐라는 동화 속에서 비비디바비디 부 라는 주문으로 그녀를 공주를 변신시켜주는 요정을 만났지만 현실 속에서 계모에게 학대받은 어린이에게는 십중팔구 뉴스에 나올 일이 생긴다. 어쩌면 현실의 대부분은 실존의 고통이며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켠 3초에서 5초 동안의 따뜻하다고 느끼는 착각이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건 아닐까라는 회의가 든다.



{ 사람들은 정치와 신, 사랑에 대해 지루한 거짓말을 늘어놓지.

어떤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한 가지만 물어보면 알 수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 A.J.F.



[섬에 있는 서점]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아내 니콜을 잃은 서점 주인 에이제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는 바람둥이 남편인 델러스 조차도 이해하게 만드는 모두가 착하다기보다는 인간이어서 무력하고 실수하고 다치는 그런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뉴스들이 사건 결과의 사실관계에 집중할 때 [섬에 있는 서점]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를 각각의 한 편의 단편집처럼 그 인물들 각각의 사연을 읽어나가는데 집중한다. 그 결과 두 살배기 딸아이 마야를 서점에 방치한 채 바닷물로 뛰어든 젊은 엄마도 바람둥이 남편을 택한 자신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더는 어찌할 수 없어서 교통사로를 내고 마는 이즈메이도 자신이 쓴 소설 [늦게 핀 꽃]을 논픽션으로 속여서 출판해야 했던 작가 리언 프리드먼도 선악의 잣대 대신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면죄부를 받는다.



{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 P301



[섬에 있는 서점]이라는 소설책은 그 속에 {에이제이}, {어밀리아}, {마야}, {이즈메이}, {렘비 에이스}, {리언 프리드먼}이라는 인물을 각각의 단편집처럼 수록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가 각각의 단편을 통해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의 삶의 전체에 다가갔던 것처럼 이 소설은 앨리스 섬에 있는 단 한 개의 아일랜드 서점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냥팔이 소녀가 느꼈던 그 찰나의 착각에 가까운 희망보다는 더 밝은 희망의 불씨를 우리 앞에 비춰 보인다.



에이제이가 사망한 후 앨리스 섬은 유일한 서점을 잃을 뻔했지만 삶과 사랑을 잃은 후 렘비에이스를 만나며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이즈메이가 서점을 인수하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책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삶이 단 한 개 있던 서점이 없어진 후의 앨리스 섬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으로 끝이 나는 동화책에 대한 환멸에 몸서리치게 된 나지만 [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 난 후에는 왠지 주인공들의 행복한 결말을 빌어주고 싶어졌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은데 책에서라도 그 꿈을 이뤘다면 어쩌면 그것도 희망이 되지 않을까.

그 모든 것을 다 잃은 순간 자신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인물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한번 사람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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