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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이름의 폭력.

#황금물고기 #책 #르클레지오 #소설 #문학동네

by 묭롶

「~네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 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마.

~네 날카로운 이빨을 자르게 해 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마.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 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슴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 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검은 사슴] p244~245



새해를 맞아 한 살을 더 먹게 된 나는 어쩌면 이제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짧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평균수명을 고려해 보더라도 나는 이미 삼분의 이를 넘은 셈이다. 절반 남은 음료를 보고 어떤 사람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고 느끼고 또 누군가는 절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며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삶에 긍정을 권유하는 그 모든 시도에 나는 반감을 갖는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되돌이켜보면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간이 구 할은 넘으니 나의 삶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굳이 답을 듣겠다면 그저 열심히 살았다고 답하겠다. 하긴 열심히 살지 않기도 힘든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열심히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거기에 망한 집에 큰 딸로 태어났으니 굴곡진 인생은 당연지사이다.


전후 세대의 어르신들이 버스 좌석에 앉아서도 짐보퉁이를 내려놓지 못하고 가는 내내 무릎 위에 얹어놓고

곧 누군가 빼앗기라도 할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것처럼 언제나 삶의 곳곳에서 불시에 나타난 돌부리로 나를 진창에 자빠뜨린 인생을 생각해 보건대 지금의 안정은 사상누각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이런 부정적인 나를 싫어하는데 내 삶의 구 할을 썼다. 정말 지독하게도 미워했고 열심히도 자학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삶의 밝은 면을 본다면 누군가는 삶의 어두운 면이 유달리 더 잘 보여서 아프고 맘이 쓰일 수도 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 어두운 면 중 가장 안쓰러웠던 것이 결국

나 자신이었음을 너무 늦게 알았으니 그게 후회라면 후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강의 소설 [검은 사슴]에서 어두운 땅 속 깊은 굴에 사는 검은 사슴은 빛을 보게 해 주겠다는 사람들의 말에 속아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울다 울다 끝내 소멸되고 말았다. 우리는 삶의 희망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뺏기고 또 뺏기고 희망고문 당하다 죽는 검은 사슴들이다.



{ 오! 작은 새들에게는 끔찍한 밤이다!

싸늘한 바람이 몸서리를 치면서 가로수 길을 내달린다.

작은 새들, 요람 속의 나무그늘 더러워진 안식처를 잃고서

언 발을 동동거리며 잠 못 이룬다.


빙판에 덮인 헐벗은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서

작은 새들, 보호해 주는 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떨고 있다.

겁에 질린 눈으로 눈을 바라본다.

오늘도 오지 않는 밤을 기다리면서. } p 212~213



삶에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지만 '검은 사슴'이 되고 마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슬픈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를 당해 부모를 잃고 노예로 팔린 라일라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향과 나이 그리고 진짜 이름도 알지 못한다. 강제로 뽑아서 옮겨 심은 식물처럼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라는 병약한 노부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음으로 품어준 노부인이 죽고 난 이후 라일라는 언제나 타인의 욕망의 대상일 뿐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다. 남자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그녀를 나이를 떠나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고 보호자로 믿고 싶었던 여의사 베아트리스마저 그녀를 욕망해소의 도구로 삼으려 했다. 자신을 삶의 주체로 세우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은 번번이 타인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라일라는 자신을 위협하는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친다. 교육을 받을 기회도 가정을 꾸릴 기회도 보호를 받을 기회마저도 계속해서 빼앗긴 그녀는 잇따른 불운 속에 청력까지 잃은 채 자신을 이끄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얼마 전 읽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낙원]에서 부모를 빼앗기고 노예로 팔린 소년 유수프의 눈에 비친 비극적인 반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면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산란을 위해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뛰어오르는 연어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산란을 하기 위한 연어의 여정(旅程)은 옆에서 지켜보기에 가혹하다. 연어 스스로 그 과정에서 어떠한 희로애락을 겪는지 지켜보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만신창이의 몸으로 산란(태어남) 후 죽는(죽음) 모습은 가혹한 운명을 대물림하는 의식과도 같아서 안타깝다. 인종과 시대와 성별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 삶을 살아야 하는 주체에게 어떠한 숙명적 폭력을 저지르며 왜 인간의 본질이 슬플 수밖에 없는지 나는 [황금 물고기]의 라일라와 [낙원]의 유수프 그리고 한강의 [검은 사슴]을 통해 다시금 되돌이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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