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두꺼운 커튼으로 창이 닫힌 방안이 보인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앞으로 손을 휘저어 몇 발짝 걷자 발에 무언가가 걸린다. 갑자기 느껴지는 오싹한 한기에 소름이 돋은 채 무릎을 구부려 발에 닿은 무언가를 더듬는 순간 왜 마디 비명을 지르며 정박사는 눈을 떴다.
'엄마?'
놀라서 솟구치듯 몸을 벌떡 일으킨 정박사는 머리에 쓰고 있던 뇌파 측정 장치를 벗고선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쌌다. 거실에서 들어와 방문을 연 남편은 정박사의 모습을 보고 침대로 다가왔다.
"여보. 괜찮아?"
"아냐. 그냥 꿈이야."
"매번 머리에 그런 걸 쓰고 자니 잠이 잘 오겠어? 꿈자리가 사나운 것도 당연하지."
"그럼 어쩌겠어. 연구비는 수억인데 실험자를 모집할 수도 없고 나라도 모르모트가 돼야지."
"휴.. 이럴 땐 내가 재벌이었어야 하는데.... 아휴 오늘 논문 심사도 있다면서 나와서 커피라도 마셔."
꿈에서 엄마를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데 가뜩이나 중요한 논문심사날 엄마를 보다니.... 정박사는 왠지 마음이 무겁다. '오늘은 또 나를 얼마나 물어뜯을는지 적은 가까이에 있다더니 모교의 학부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다니...... 그래도 일단은 부딪혀봐야겠지.'
남편이 내려놓은 커피를 텀블러에 담은 정박사는 논문심사장이 있는 순수대학교로 향했다. 순수대학교의 정문을 지나며 정박사는 의대를 지망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빠가 너 대학은 보내주겠지만 너 엄마랑 더는 안 되겠다."
"아빠, 엄마 조금만 더 봐주면 안 돼? 내가 더 잘할게. 어. 제발."
"늬 엄마는 미쳤어, 나도 할 만큼 했다."
"아빠, 엄마는 수면장애지 정신병이 아니야. 내가 의사 돼서 엄마를 꼭 고칠 거야.
그니까 조금만.. 어.. 조금만... "
매달리던 나를 뿌리치고 집을 나간 아빠는 곧 새살림을 차렸다. 아빠가 준 돈은 정말 받고 싶지 않았지만 난 의사가 돼야만 했다. 하긴 이젠 치료할 엄마는 없지만. 난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다음 논문은 뇌파시그널 변환을 통한 수면 개선의 가능성을 주제로 순수대학교 의학대학 정박사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연단에 선 정박사는 발표를 하기 전 숨을 고르며 좌중을 살폈다. 바로 눈앞에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의과대학 학과장이 보인다. 그 주변에는 학과장의 똘마니들이 건성으로 정박사의 논문을 뒤적이는 중이다.
"사람의 수면뇌파는 수면의 상태별로 고유 시그널을 갖고 있습니다. 수면단계에서 측정되는 램수면의 알파파와 비램수면 단계의 델타파가 바로 그 시그널입니다. 라디오가 특정 주파수에 맞춰진 채널이 있는 것처럼 알파파와 델타파는 특정한 패턴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의 수면 측정 장비들이 램수면 상태의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데이터로 표시하여 단순히 개인의 수면상태를 표현하는데 국한된 반면 지금 발표하는 제 논문은 개인수면 뇌파 시그널의 고유성을 이용한 램수면 상태의 뇌파를 비램수면 상태로 변환하는 방법에 관한 결과물입니다.
논문 127쪽부터 제시되는 수면 뇌파 변환 방법은 음반의 녹음과정과 흡사합니다. 먼저 시험자의 고유 수면 뇌파를 기록한 뒤 음반의 믹싱과정처럼 시험자가 램수면 상태일 때 비램수면뇌파의 파장을 출력하고 동시 출력되는 램수면의 알파파 볼륨을 묵음상태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자는 램수면이 없는 비램수면 상태를 장시간 유지함으로써 수면의 질 개선 효과를 보게 됩니다. 이는 기존 램수면에서 비램수면 전환에 장애를 갖고 있는 수면장애 환자들에게 수면유도제와 같은 부작용을 겪지 않고도 완전한 수면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수면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돕는 것이 제 논문의 목적입니다."
정박사의 발표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논문심사 진행자는 논문심사 행사장 내부를 둘러보다 마이크를 들어 진행 발언을 했다.
"발표된 논문에 대한 질의를 듣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줄에 앉아 있던 순수대학교 의과 학과장 이 앞에 놓인 마이크 버튼을 켜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잠을 줄여서라도 공부하고 잠을 줄여서라도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라고 있는 것이 의과의 명분인데 한가롭게 수면의 질이나
따진다는 건 시간낭비 아닌가요?
이미 수면질환 개선을 위한 대체약물과 다양한 정신상담 치료를 통한 개선방안이 있는 지금 이 연구가 원하는 방향성에 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추가로 논문에 제시된 시험데이터의 측정량이 이렇게나 소량인데 이 데이터를 가지고 일반화된 논문을 통과할 거라고 보는 겁니까?"
학과장의 말이 떨어지자 논문심사장엔 침묵이 가득했다. 연구비가 부족한 나머지 가족과 지인을 시험데이터로 삼았던 정박사는 학과장의 지적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눈시울마저 붉어져 앞에 놓인 논문의 글씨가 희미해지고 그 위로 자신의 의사면허가 새겨진 정신의학과 전문의 합격증이 겹쳐 보였다.
"엄마. 엄마. 엄마 딸 전문의 땄어."
합격증을 손에 들고 방문을 연 순간 침대에 쓰러져 있던 엄마. 침대 옆에 놓인 위스키와 졸피뎀 한통...
의학적으로 이미 사망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엄마를 깨우려 미친 듯이 엄마를 흔들던 내 손.
그리고 온통 소용돌이치며 사라질 듯 흔들리던 시야...........
머릿속이 하얘지며 쓰러질 듯 발표연단을 움켜쥔 정박사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는
그순간 맨 뒷줄에 있던 순수대학 이사장의 조카인 드림제약 박상무가 손을 들었다.
"그 연구. 드림기업이 지원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