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 매화나무 가지가 이곳저곳에 놓인 방안은 은은한 꽃 향기로 가득했고 정갈하게 차려진 한상차림 앞에 일본 귀족 복색을 갖춘 가토 경무국장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오른쪽 옆자리에는 경성 치안총감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왼쪽에 통역이 자리했다. 가토가 손을 들어 술병을 잡자 치안총감이 앉은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술을 대신 따라주려 했지만 가토는 눈짓 한 번으로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가토는 천천히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일어): 내가 이래서 내 옆자리를 내어주지 못하네.
가토의 한마디에 치안총감은 앉은자리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무릎을 꿇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일어): 국장님의 혜안(慧眼)이 아니었다면 태극회를 일망타진하진 못했을 겁니다.
가토는 술을 한잔 마시고는 고개를 숙인 총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일어): 매월이를 내게 소개한게 총감 아닌가.
그의 한마디에 총감의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났다. 태극회가 국일관에 심은 매월이를 가토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가토에게 자신의 앞날을 위해 한자리 포석을 둔다는 것이 자충수가 될 거라고는 추호의 의심도 없던 그였다. 매월이 침소에서 가토를 암살하려 시도한 그 순간 자신의 미래도 같이 암살당한 것과 같았다. 결국 가토의 고문에 못 이긴 매월이 태극회의 소재를 실토했고 반도에서 가장 큰 조직인 태극회를 말살한 공은 가토가 갖게 되었다.
(일어): 다시는 그런 실수는 없을 겁니다.
말없이 손짓을 보내는 가토의 기척을 알아챈 총감은 서둘러 뒷걸음질로 그 방을 빠져나왔다.
방문을 빠져나오고서야 총감은 양복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눌러 닦았다.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로 갈무리하는 총감의 눈에 방으로 들어가려는 여자가 보였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일어): "너 구나."
면사를 쓴 채 방으로 들어선 여자를 본 가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일어): "내가 여자는 없어도 음률 없이는 술을 못 마시는데 참으로 적적했구나.
내 너를 여러 차례 불렀는데 왜 이제야 온 것이냐?"
면사를 쓴 여자가 선 채로 답했다.
"부족한 재주로 나리의 귀를 더럽힐까 걱정되어 그리하였나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통역이 가토에게 일어로 말을 전하려 할 때 가토는 급히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입을 열어 답하는 그 음성의 청아함에 귀가 번쩍 트인 가토는 그 음성에 통역사의 목소리가 실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일어): "참으로 안타깝구나. 네가 대일본제국의 언어를 알지 못하다니,
그 목소리로 황군(皇軍)을 위해 봉사한다면 그 얼마나 큰 애국이겠느냐."
통역사가 전해주는 가토의 말을 들은 여자가 답했다.
"소녀, 무지몽매하여 음률 하나를 깨우치는데 십 년 이상이 걸렸나이다.
그리 큰 은혜는 제게 천부당만부당하나이다.
그저 나리를 위해 소녀가 할 수 있는 성심을 다 할 뿐이지요."
(일어): "그래, 조선의 신민이 나의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내 이리
상처받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내 아픈 마음을 네가 음률로 달래주려무나."
통역의 말이 전해지자 여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저 하늘의 달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모두들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어요.
꿈속에서만 잡히는 님의 손길.
어찌하면 님에게 닿을까요.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님의 모습.
눈을 뜨고 보려면 어찌하나요.
이 생을 버리고 날개를 달면
님이 계신 그곳에 닿을까요.
오늘도 밤하늘만 바라보는 이내 마음.
그대는 꿈에서도 모를 테죠. }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들어 올린 술잔을 손에 든 채 멈춰있던 가토는 노래가
끝난 후에도 여운에 잠겨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침내 손에 든 술잔을 다시 상 위에 올려놓은 가토가 그녀에게 물었다.
(일어): " 이 곡의 제목이 무엇이더냐?"
"단장(斷腸)이옵니다. 사모하는 님이 그리워 애간장을 끓이는 심정을 곡에 담았사옵니다."
(일어): "그럼 이 곡을 내가 지었단 말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일어): "얼굴은 왜 면사로 가린 것이냐. 내 너의 얼굴을 봐야겠다."
"미천한 용모에 눈을 어지럽히실까 두려워 그랬사옵니다."
(일어): "명령이다. 당장 면사를 거둬라."
통역의 말을 듣고 여자는 면사가 둘러진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어 손에 든 여자가 고개를 들어 가토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