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플랜 B(미리내)
"사장님, 큰일이에요."
오늘따라 한산한 다방 안 테이블을 닦던 사환이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여사장을 보자 말을 꺼냈다.
"왜? 뭔데? 그나저나 오늘 왜 이렇게 파리 날려?"
여사장은 손님 없이 휑한 가게 안을 둘러보며 사환에게 물었다.
"모르셨어요? 지금 제비에서 베일에 가려진 소녀가 노래를 부른다잖아요.
음악다방마다 소녀를 찾느라고 난린데 모르셨어요?"
"아니..... 사장인 내가 이렇게 어여쁘고 코오피도 맛난데 소녀가 대수야?"
"아이고.. 모르는 말씀 마세요. 그 노랫가락 한 소절 듣고 나면 넋을 놓는다는데요."
사환과 여사장은 얘길 나누느라 문을 열고 들어온 가토 경무국장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사실 가토는 조선말을 듣고 말할 수 있었지만 반도의 말을 자신의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서 통역을 대동하고 다녔다.
뒤늦게 들어와 테이블에 이미 앉아 있는 가토를 발견한 여사장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가 항상 마시던 커피를 내어왔고 가토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담배를 태웠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꽁초를 버린 가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쇼헤이 경감에게 말했다.
(일어): " 그 아이를 내게 데려오게."
가토 암살을 위해 태극회와 지리산은 각각의 작전을 준비했다. 기존에 준비했던 암살 작전들은 가토를 살상할 수 있는 거리에 접근하기도 전에 모두 차단당한 채 실패를 거듭했기에 가토에게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작전을 세워야 했다. 태극회는 삼국지에서 여포를 사로잡았던 초선처럼 경국지색인 명월을 이용한 미인계를 준비했다. 물론 어려서부터 비밀조직과 함께 했던 명월이었기에 총기를 다루는 법부터 자신의 한 몸을 지킬 수 있는 실전 무술까지 연마했지만 한 번의 타격으로 뼈를 부수는 가토의 극진 가라데 앞에 명월은 제압당하고 말았다. 더 뼈아픈 일은 명월이 가토의 손에 들어간 이후 태극회 조직이 가토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회와 지리산이 여성동지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같은 작전을 동시에 수립했던 것은 한쪽이 실패한 직후에 또다시 같은 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적들의 방심을 기회로 삼기 위해서였다.
자명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가장 크게 중점을 둔 것은 바로 명령을 전달하는 암호 체계였다. 태극회가 연결된 한 사람의 노출로 인해 다음 사람이 그리고 또 그다음 사람이 줄줄이 엮어들었갔던 것처럼 이 작전에서는 작전을 수행하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몰라야 했다. 자명이 본인의 큰 혐님에게도 자신의 실체를 숨겼던
것처럼....
자명은 대한제국은 물론 일본인에게도 생소한 서양의 악보를 통해 암호체계를 수립했고 경성에 있는 블랑세 악보사를 암호 전달의 거점으로 삼았다.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는 각각의 한글 자음과 모음을 뜻했고 4분의 3박자는 악보 중 네 번째 줄의 세 마디를
암호표에 대입하면 해독이 가능한 방식으로 명령이 전달되었다. 미리내는 경성으로 오기 전 이미 암호표를 머릿속에 외우고 있었고 순간적으로 전달된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명령은 전달되었다.
경성에서 노래하는 베일에 가려진 소녀는 정기적으로 악보를 보기 위해 블랑세 악보사에 들렸고 악보사 주인이 추천해 준 악보는 소녀가 본 직후에 바로 불태워졌다.
미리내가 가토에게 노래를 들려준 뒤로도 그로부터 여러 차례 초청이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다섯 번에 한 번만 초청에 응했다. 부를 때마다 즉각 달려가는 것도 가토의 의심을 살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녀로서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을 위해 당장이라도 쏴 죽이고 싶은 가토 앞에서 표정관리를 하느라 너무나 힘들었던 미리내에게 악보가 전달되었다.
'10월 25일 꽃무늬 찬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