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2화. 1938년 지리산.

by 묭롶

지리산 화엄사 경내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산 아래가 굽어 보이는 곳에 바닥이 평평한 큰 바위가 있었다.

자명스님은 그 바위 위에 좌정하고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화엄사와 지리산을 향해 끝도 없이 펼쳐진 은하수가 눈부신 별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찬란한 별빛 아래서 자명스님은 염주알만 굴릴 뿐이었다.


"왜 주무시지 않고 여기 계세요?"


미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자명은 감았던 눈을 떴다.


"낮에 스님을 찾아오셨던 분은 누구세요?"


재차 묻는 미리내의 물음에 자명은 조용히 손으로 바닥을 가리켜 앉으라고 손짓을 한 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은 미리내의 얼굴에서 돌아가신 큰 형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1919년 3월 1일 구례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했던 큰 형님과 형수는 당일 현장에서 큰 형님은 일본군의 총탄에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고 출가한 자신을 찾아온 형수는 갓난아기를 자신에게 맡긴 뒤 숨을 거뒀다.

삼칠일도 되지 않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조카에게 자명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변치 않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리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이는 사찰 요사채에서 보살 어멈들 손에 컸고 자명은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아이가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미리내, 난 네가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스님, 세상이 이러한데 어찌 제 한 몸 편할 수 있을까요."


답을 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은하수처럼 빛났다.


"제 부모님도 3.1 만세 때 돌아가셨다는데 왜놈들과 한 하늘 밑에 살 수는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어요."



타협이라고는 일도 없이 대쪽 같았던 큰 형님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있는 조카를 보면서 자명은 큰 형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1919년 초 3월 1일 만세 운동을 조직하라는 밀서를 받은 큰 형님은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말로는 출가인이므로 속세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며 형님을 돌려보냈지만 사실은 큰 형님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마저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일제는 항일운동 조직의 숙청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독립군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고 국내에서의 비밀 조직은 함경도를 연결점으로 하는 연해주와 러시아 군사 조직과 경성을 중심으로 한 태극회 그리고 지리산을 근간으로 한 삼남 조직이 항일운동의 요체가 되었다.

지리산에 있는 화엄사가 바로 삼남 조직의 본산이었다. 자명스님은 수박권을 계승한 무승(武僧)으로 비밀리에 화엄사의 지하에 위치한 밀실에서 항일 운동원을 육성해 왔다. 자신의 실체를 큰 형님마저도 몰라야 했기에 냉정했던 그가 이제 조카마저 나라에 바쳐야 한다니 자명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태극회가 가토의 손에 절단이 났다.

실패를 대비해 준비해 둔 계획을 실행해 달라는구나."



태극회가 절단이 났다는 자명의 말에 미리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수놈들이 기어이.........'



1934년 경무국장으로 취임한 가토는 취임사로 국내 항일 독립군 조직의 말살을 지시했다.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혹한 감시망의 강화로 인해 국내 독립운동은 고사할 위기에 처했고 항일운동의 부활을 위해서는 가토 암살이 최우선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한 가토를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서 십여 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태극회와 지리산은 비밀리에 회의를 거쳐 가토 암살계획을 세웠는데 가토가 유일하게 가까이하는 음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태극회에서는 비밀리에 육성해 온 명월이를 국일관에 심기로 했고 지리산에서는 미리내를 작전에 투입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교육을 시켜왔었다. 살아생전 서편제 계승자였던 형수를 닮아 미리내는 창뿐만 아니라 창가(唱歌)에도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자명이 조카에게 가장 크게 공을 들인 부분은 무술이었다. 수박권은 작은 힘과 작은 동작만으로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실전 무술로 남자보다 힘이 약한 여성에게 가장 효율적인 공격법이자 방어법이었고 미리내는 무술에도 발군(㧞群)의 자질을 선보였다.



"하겠어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조카를 보며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자명은 나직이 한숨을 내리 쉬었다.



"경성에 있는 블랑세 악보사로 가거라. 앞으로의 지시는 베토벤으로 보내마."


















이전 01화나를, 죽여줄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