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4화. 플랜 B(미리내)-2

by 묭롶

만향루의 주방에서는 매화실에 내어갈 음식 준비가 한참이었다. 대전숙수였지만 지금은 만향루의 주방을 맡은 김숙수는 신선로에 전골을 담고 찬합에 구절판 재료들을 정갈하게 담아 꽃무늬가 그려진 찬합 뚜껑을 닫았다. 가토는 평소 식은 음식은 먹지 않았기에 모든 음식은 그가 도착하기 삼십 분 이내에 조리해서 즉시 내어가야 했다.


가토는 정각 여섯 시에 매화실에 도착했다. 가토의 가문은 오백 년 동안 나고야 성의 성주였다. 어려서부터 귀족으로 길러진 그는 본토에서의 세습 귀족 작위를 버리고 황군(皇軍)으로 복무하기를 자처했다. 그는 경무국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제복을 착용했지만 평소에는 성주의 복장에 사무라이 군장을 착용했다. 도(刀)를 음률만큼이나 가까이했던 만큼 그는 자신의 刀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차려진 저녁상을 앞에 두고 앉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조선의 말과 독립군은 싫었지만 조선의 음식은 노래만큼이나 멀리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율배반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자신이

이 정도는 누려야 하지 않겠냐는 자기합리화를 그는 입에 감기는 조선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되뇌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평소 그리 맛있던 음식도 섣불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미리내는 가토가 도착한지 삼십 분쯤 지나 매화실의 문을 열었다. 여전히 베일을 내린 모자를 썼지만 방에 들어선 뒤에는 모자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조용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나직이 쳐다보던 가토가

말했다.



(일어): "오늘은 내게 무슨 노래를 들려줄 텐가?"


조용히 한쪽 구석에 있던 통역이 미리내에게 말을 전했다.


"소녀, 창(唱)을 조금 하나이다. 식사의 흥도 돋울 겸 춘향가의 사랑가는 어떠신지요."


(일어): "그래, 사랑 좋지. 들어보자."



임무를 위해 원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오늘이 지나면 이제 노래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니 미리내는 평소보다 노래에 마음이 더 쓰였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담아 창(唱)을 시작했다.



"사랑~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내 사랑아~~~~"



사랑가를 부르며 미리내는 생각했다.


'나보다 어린 춘향은 그 나이에 서방님과 정을 쌓아

그 정에 아파하고 목숨도 걸었다는데 나는 나라사랑에 목숨을 걸어 오늘 이리 스러지는구나.'



그녀의 노래를 듣는 가토는 모든 생각이 지워진 채 온통 머릿속에 음악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일본도 조선도 없었다.



(일어): "이리 와서 술 한잔 하겠느냐."


'그래, 내 이 순간을 기다렸다.'


미리내는 속 마음을 감춘 채 웃으며 차려진 상 앞으로 다가갔다. 넓은 상 위에 꽃무늬 찬합이 보였다. 그녀는 상 앞에 앉아 조용히 교묘하게 감춰진 찬합의 아랫부분을 잡아당겼다. 찬합의 앞이 그녀의 손을 그리고 그녀의 등이 그녀의 행동을 감춰주고 있었다.







열린 찬합의 아랫부분에는 있어야 할 권총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 당황했지만 웃음으로 표정을 감춘 미리내가 조용히 찬합을 닫았다.



(한국어)" 이걸 찾나?"



찬합 안에 있어야 할 권총은 가토의 손에 들린 채 자신을 향해 총구가 겨눠져 있었다. 그녀를 겨눈 채 가토가 말했다.



(한국어)"어지간해서 조선의 말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통역을 통할 상황이 아니니 내 직접 말하마."

"허 참, 내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뻔하다니... 다행히 그 멍청한 놈이 떨어서 찬합을 떨어뜨리지만 않았다면

오늘밤 내 시체가 안주가 됐겠지."


"그런데 말이지... 그놈을 족쳐봤자 널 사주한 놈을 잡진 못할 것 같아 널 기다렸다."


그 순간 방문을 열고 총으로 완전무장한 일본군 일개 소대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순간 가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조선의 계집 하나를 상대하는데 황군 한 소대라니.... 나가 있어."


가토의 손짓 한 번에 일본군은 방밖으로 나갔다.


"총으로 널 쏘면 네 뒤는 못 캘 테니 우선은 널 살려야겠지.

그래 대답할 정도만 되면 되니 먼저 몇 군데 손을 보자."



가토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일본도를 검집에서 빼어 들었다.

미리내는 그가 기다란 일본도에서 刀를뽑아 드는 순간을 노렸다. 그가 刀를 미쳐 다 뽑기도 전에 그녀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가토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의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에게 당황한 가토는 몸을 돌리려 했지만 미리내는 도를 들고 있는 가토의 팔꿈치 안쪽을 가격했다. 순간 팔꿈치에 가해진 엄청난 고통에 가토의 한쪽 팔이 전기에 감전된 듯 떨렸고 손아귀 힘이 풀렸다. 刀를 쥔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미리내는 일본도를 낚아채어 뒤에서 가토를 몸을 안은 채 일본도를 그대로 가슴 깊이 찔러 자신의 등 뒤까지 관통시켰다. 안에서 들리는 소음에 군인들이 다시 방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자신의 늑골을 부수고 몸속 깊이 들어오는 시린 칼날을 느낀 그 순간 미리내는 생각했다.


'아까 임무를 포기하지 않길 다행이야. 내가 잡히면 자명 스님은 그리고 화엄사의 동지들은 어찌 되겠어.

결국 가토를 죽였으니 난 임무를 완수한 거야.'


숨이 끊기기 전 자신이 처한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흡 뜨인 가토의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킬 때 미리내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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