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스마트 폰을 바꾼 민정은 가족 결합 요금제 변경을 위해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얼마 뒤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고객님을 상담해 드릴 상담사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2018년 10월 18일부로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 중이오니 폭언을 삼가해주세요.
잠시 기다리시면 상담사를 곧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안내멘트 이후에 연결된 상담원의 목소리는 기운이 없었다. 민정이 요청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재확인 절차 없이 마지못해 대답을 겨우 하는 모습에 그녀는 과거 자신이 상담센터에 근무했던 시절의 매뉴얼이 눈앞에서 프롬프터처럼 줄을 이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상담직원들의 목소리만 대충 듣고도 그 직원이 오늘까지만 일하고 콜센터를 박차고 나갈지 아니면
그냥 어떻게든 그 시간을 견디기만 하기로 결심을 했는지 그도 아니면 귀에 들려오는 음성에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직원은 오늘까지만 일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상담사와 겨우 처리해야 할 일을 마무리한 민정이 스마트폰 너머에 있는 상담사에게 말을 건넸다.
"피곤하고 힘드실 텐데 상담사님이 도와주셔서 일이 빨리 처리됐네요. 고마워요."
그녀의 말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는지 종료멘트를 안내하는 상담사의 음성이 조금은 밝게 들려왔다.
민정은 통화 종료 후 문자로 들어온 상담사 평가 항목에 10점 만점에 10점을 주었다. 상담센터 직원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가전제품을 서비스받거나 통신사에 전화를 하거나 심지어
민원 관련하여 세무서를 통화한 뒤라도 평가항목을 일부러 찾아서 만점을 주고 칭찬글을 남기곤 했다.
그녀는 상담센터를 통화할 일이 생길 때마다 '2018년 10월 18일부터'라는 전화 응대음을 들을 때면 그 문구가 가슴에 박히는 것만 같았다. 고객이 아무리 심한 폭언과 성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통화 종료 버튼을 먼저 누를 수 없었던 2018년 10월 18일 이전을 살아냈던 상담센터 직원들의 얼굴이 그 멘트를 들을 때마다 한 명 한 명 눈앞에 떠오르는 그녀였다.
그 시절의 상담사들에게 말은 그들을 죽일 수도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였고 최소한의 보호장치인 산업안전보건법조차 없던 그때 그녀는 마음의 속살이 여린 젊은 그들을 팀원으로 데리고 있는 팀장이었다.
고객상담센터에 전화를 거는 고객 민원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크게 분류한다면 첫 번째는 주소변경이나 자동이체 변경 등 업무와 관련된 건이었고 두 번째는 컨설턴트와의 분쟁이나 보험금 지급과 관련된 불만 접수였으며 세 번째는 그냥 자신의 가슴에 쌓인 감정을 배출하기 위함이었다.
상담센터의 높은 이직률의 원인이 바로 이 세 번째 민원에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가 있던 시절에 그런 부류들은 발신자 표시가 되지 않는 익명성에 힘입어 소방서나
경찰서에 장난전화를 걸었다. 그 뒤에 해당 전화가 법적 처벌 대상으로 강화된 이후로 그들은 자신의 감정의 쓰레기통을 각종 고객 상담센터에 비우기 시작했다.
직접 만나서는 입도 벙긋 못할 인종들이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해도 전화도 끊지 못하고 대응조차 못하는 약자인 상담센터 직원들을 뭉개고 짓밟는데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고 약자를 괴롭히는 맛을 알게 된 그들은 활약할 기회만을 노렸다.
민정은 고객상담센터 팀장으로 있던 십 년 동안 이런 부류를 정말 지긋지긋하게 봐왔다. 타인의 살만한 꽃밭을 지옥으로 만들고 불태우는 비열한 놈들에 대한 분노가 그녀에게 만성 두통과 화병을 안겼다.
그녀가 팀장으로 있는 동안 그녀는 아침 조회 시간마다 팀원들에게 말했다.
"코드 블랙이 뜨면 언제든 제 자리 인터폰으로 즉시 연결하세요.
거기서 더 응대하지 말고요.
자. 오늘도 외치고 시작합시다.
나는 소중하다. 나는 소중하다. 나는 소중하다."
하지만 정작 그 시절 가장 보호받지 못했던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분명히 요금제 관련해서 통화를 한 것 같은데 말없이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의 표정이 이상해서
별아는 그녀에게 다가와 달싹 안기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엄마엄마. 왜 그래?"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안겨있는 딸아이의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 시절 아침 조회 때 보호자를 바라보듯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던 팀원들의 눈빛이 그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