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침실에 들어간 별아는 자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창문에 드리운 커튼을 걷었다. 커튼을 걷자마자 민정의 얼굴 위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 꽂혔다. 하지만 눈부신 햇살로는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잠결에 몸을 돌려 창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다시 자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별아는 침실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 엄마는 아직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일어나겠지만 별아는 그동안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별아가 엄마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민정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비몽사몽 꿈에 취해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월말 마감인데 마감 실적 보고서를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곧 회의실로 자료를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회의실 안쪽에서는 한팀장을 찾는 본부장의 음성이 들려오고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컴퓨터는 그녀가 타이핑하는 글자마다 이상하게 깨져서 표시되는 통에 머리가 아파왔다. 참을 수 없는 두통에 머리를 쥐어 싸맨 그녀가 어떻게든 보고서를 쓰기 위해 눈을 부릅 뜬 순간 그녀의 눈에 누군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 엄마... 눈 떴다."
침대 위로 올라와 자신의 가슴에 팔을 얹고 얼굴을 들이민 별아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오지 않은 그녀가 손으로 눈을 비비고는 딸아이를 쳐다보았다.
"아가야.. 왜... 엄마 좀만 더 자자."
엄마가 다시 자려고 손으로 이불을 위쪽으로 추켜올리자 딸아이가 이불을 냅다 빼앗아 들고는 침대 옆에 서서 발을 굴렀다.
"안돼... 안돼... 일어나.."
-"왜... 무슨 일인데...."
딸아이의 성화에 민정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게임기 설치해 줘..."
-"왜? 아빠한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아빠, 지금 한 시간째 설명서만 읽고 있어.. 아빠 안돼. 엄마가 해."
생일선물로 사준 게임기가 민정이 자고 있는 동안 새벽배송으로 도착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도착한 택배를 발견한 딸아이 별아는 금세 포장을 다 뜯어놓고는 아빠인 서준에게 당장 설치를 해놓으라고 달달 볶은 눈치였다. 하지만 원래 뭐든지 설명서부터 완독한 이후에야 다음을 진행하는 서준이었기에 이번에도 글씨가 작은 게임기 설치 설명서를 제목부터 목차를 거쳐 한 시간이 넘도록 읽고 있었으니 딸아이는 주말에 자는 엄마를 깨우지 않는다는 금기를 깰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민정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거실 탁자 위에는 게임기 부품들과 각종 케이블이 널려 있었고 서준은 소파에서 여전히 설명서와 부품을 대조하다가 다가오는 민정을 보며
별아를 나무랐다.
"엄마.. 피곤한데 깨우지 말라니까. 이제 조금만 더 보면 돼."
-"아빠 기다리다 천년 걸려. 흥.. 칫"
민정은 베개에 깊숙이 파묻고 자느라 밤새 눌린 자욱이 가로로 볼에 선명하게 새겨지고 머리카락은 금방 추포 된 언년이 꼴인 상태로 게임기 본체에 케이블을 꽂기 시작했다. 곧이어 본체에 연결된 케이블 중 영상출력 케이블과 음성출력 케이블을 TV 뒤 단자에 색깔별로 꽂고는 게임 컨트롤러에 건전지를 끼웠다. 그리고 본체에 전원케이블을 연결한 뒤 전원을 켰다. 스위치를 켜자마자 TV에 게임 메인 화면이 표시되었다.
TV에 게임 화면이 뜨자마자 딸아이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별아야. 아래층... 이모..."
그녀의 말에 제자리뜀을 멈춘 별아가 그녀를 향해 엄지 척을 하고는 아빠에게 혀를 날름거렸다.
그제야 딸아이에게서 벗어난 민정은 주방에 들어가서 컵에 물 한잔을 따라 마시며 생각했다.
'그때도 저렇게 요령이 없었지.'
"그걸 왜 해야 하죠?"
서준이 입을 연 순간 회의실 내부는 정적이 감돌았다. 사내 이벤트 홍보를 위해 팀별 할당이 떨어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없던 인맥이라도 동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팀장인 민정은 해당 건과 관련해서 팀원들의 도움을 구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눈만 굴리고 있을 때 서준이 팀장인 민정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제 월급에 제가 아는 사람의 개인정보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까?
그걸 왜 강요하시는데요?"
그의 말에 민정은 한숨을 푹 쉬며 생각했다.
'그간 받은 신입 중에 젤 까칠한 것 같아.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저런 패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그녀가 그를 보며 말했다.
"지금 제가 드리는 건 강요가 아니라 부탁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분들은 참여 안 하셔도 됩니다."
팀장인 민정의 말에 팀원인 수진이 서준을 흘겨보았다.
-"아니에요. 팀장님 안 그래도 저희 때문에 곤란하신 게 많으신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열다섯 명은 해올 수 있어요."
수진이 입을 열자 팀원들이 너도나도 자신들도 도울 수 있다며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고 회의실은 시끌시끌해졌다. 그녀는 서준을 뺀 나머지 팀원들에게 이벤트 신청서를 나눠주고는 회의를 마쳤다.
아침 회의가 끝난 후 오전 10시부터 폭주하기 시작하는 상담전화는 교대로 이뤄지는 점심시간을 지난 오후 2시에 통화량이 꼭짓점을 찍고 있었다. 업무 하는 틈틈이 상담센터 직원들을 챙겨보던 그녀의 눈에 딱 봐도
상담 내용이 버거워 보이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급한 보고서를 메일로 전송한 그녀가 팀장실에서 걸어
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잠시 서준의 모니터에 올라와 있는 고객 민원을 확인한 그녀가 서준이 쓰고 있던 상담용 헤드셋을 벗겨서 자신이 쓰고는 어리둥절해하는 서준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고객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저는 이 팀의 책임자인 한민정 팀장입니다.
실례되지만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당신이 팀장이요?
직원 교육 좀 잘 시켜야겠소.
이건 뭐 답답해서 원....."
"고객님 오늘 보험 해지 관련해서 전화를 주셨지요."
-"그니까 내가 해지를 원하면 해주면 되는 거지.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환장하겄소."
"요즘 다들 너무 힘드시죠. 불편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고객님 이건 제가 봐도 해지 환급금이 원금 대비 너무 낮아요.
이년만 더 유지하셔도 환급률이 칠십 퍼센트는 되시는데요."
-"그걸 누가 모르요. 오죽하면 그러겄소."
"고객님 차라리 보험금 출금 일시 정지는 어떠실까요.
육 개월 정도 놓고 고민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한참을 망설이던 고객이 결심을 굳힌 듯 그녀에게 말했다.
-"에휴.. 그럽시다. 어차피 해지해봤자 큰돈도 안되는데."
"고객님의 현명하신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더 문의하실 내용이 있으실까요."
-"아고 아니요."
"네네 고객님, 지금까지 고객님을 도와드린 저는 한민정 팀장이었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그녀가 통화 종료 멘트를 말하는 동안 고객은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모니터링 화면에 통화내용 기록을 마친 그녀가 서준에게 헤드셋을 건네주었다.
"서준 씨, 고객의 전화를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이 무얼 원하는지를 아는 거예요.
두 번째로 중요한 건 공감이죠. 그 두 가지만 기억하면 상담이 조금은 더 쉬워질 거예요."
그녀가 말을 하는 순간 그는 그제서야 그녀가 자신의 팀장으로 여겨졌다. 그냥 뚱뚱한 꼰대라고 치부해 버렸던 그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한 그가 멍하게 서 있을 때 그녀가 곧이어 울리는 전화를 받으라며 손가락으로 불이 들어온 인터폰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