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막차가 끊긴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어서 시내 택시 정류장에는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딸아이 별아와 영화를 본 민정도 이십 분 넘게 서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드디어 택시가 그들 앞에 멈춰 섰을 때 세 줄로 분류된 대기 줄 중 옆줄에 있던 남자 둘이 민정 앞에 멈춰 선 택시의 뒷좌석 문을 열려고 했다.
"이보세요. 그쪽 줄은 옆이잖아요."
민정이 먼저 뒷좌석 문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딸아이의 손을 잡은 채 남자들을 막아섰다.
남자 둘은 젊고 체격이 건장해서 딸아이는 겁이 나는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좀 급해서요. 먼저 좀 갑시다."
껄렁한 남자의 말에 민정은 남자들에게 강한 눈빛을 쏘아주고는 그대로 택시 문을 열고 딸아이를 안쪽으로 밀어 앉히고 자신도 뒷좌석에 앉은 뒤 노려보는 남자들 면전에서 문을 쾅하고 닫고는 기사에게 곧바로 아파트 이름을 얘기했다. 택시가 출발하고서도 뒷 유리창으로 남자들의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다 이내 보이지 않게 되자 제자리에 앉은 딸아이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정을 쳐다보았다.
-"엄마엄마. 집에서는 맨날 아빠한테 지잖아.
아까는 왜 그랬어? 안 무서웠어?"
"별아야. 센 놈한테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 강하면 그건 비겁한 거야.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엄마는 그런 게 싫어."
-"엄마엄마. 그럼 아빠는 약하니까 져주는 거야?"
자신을 올려다보며 묻는 딸아이의 진지한 표정이 귀여워서 민정은 웃음이 났다.
"아니지. 아빠는 약한 게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 져주는 거야."
'그런데 이 남자가 언제부터 내게 특별했었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민정이었다.
블랙 컨슈머: 구매한 상품을 문제 삼아 피해를 본 것처럼 꾸며 악의적 민원을 제기하거나 보상을 요구하는
소비자.
민정은 아이피생명 고객상담 1팀 팀장을 맡은 뒤 코드 블랙을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코드 블랙은 팀원들과의 암호명으로 고객의 통화 내용이 갑질, 진상, 선정성의 정도가 심각하여 팀원 스스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뜻했다. 2018년 10월 18일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되면서 위와 같은 내용의 전화는 상담원이 먼저 끊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상담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그녀는 아침 회의 때마다 항상 코드 블랙의 상황이라 판단되면 그녀가 자리에 있을 때는 자신에게 인터폰을 돌릴 것을 강조했다. 물론 다른 2팀과 3팀의 팀장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즉시 반감을 드러냈다. 명백히
업무보직이 다른데 업무영역 바깥까지 침범해서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다며 공개적으로 그녀를 저격했지만 그녀는 그 방법 외에는 팀원들을 지킬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에 코드 블랙을 강행했다.
코드 블랙으로 판단되는 고객의 인터폰이 돌려지면 그녀는 즉시 해당 고객의 문제점을 즉시 파악한 뒤 욕설이나 선정적인 공격을 시전 하는 고객에게는 "네.. 고객님 지금 가입하신 보험의 약관이 궁금하시단 말씀이시죠."라고 말한 뒤 약 오분 넘게 안내되는 약정서 문구 재생 버튼을 눌러 상세한 안내문을 해당고객에게 들려주었다.
듣고 괴로워하는 대상이 없어진 고객은 안내문이 몇 줄 안내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통화를 끊고 나서도 해당 전화를 했던 고객의 데이터에 문제 내용 녹음 파일을 업로드했고 그 고객이 다시
전화를 거는 경우에는 자신이 전화를 다시 받아 폭언 및 성희롱 발언에 대한 일자별 데이터를 기록해 두었다.
보험 해약률 방어를 위한 고객 설득 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쓰느라 PPT 자료에 적힌 숫자를 집중해서 보던
민정은 눈이 시큰거려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을 때 팀장실 바깥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들려왔다.
"이... 개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놀라서 황급히 팀장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의 눈에 상담부스에서 일어나 포효하고 있는 한 마리 야수가 포착됐다. 그 야수는 바로 서준이었다.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은 그녀가
그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이미 전화는 끊긴 상태였고 그녀는 우선 서준을 휴게실로 데려다 놓은 뒤 문제의
전화내용 녹취기록을 확인했다.
-녹취내용-
["반갑습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라.. 이거 뭐야? 남자네?"
"고객님 어떤 내용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뭐 하는 놈이길래 지지배들 하는 일을 하고 있어?"
-"고객님... 업무와 관련 없는 내용은 자제해 주십시오."
-"남자가 돼가지고 상담원이나 하고 있고 고추를 따불제. 뭐 하러 달고 있어?"]
녹취 내용을 들은 민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 됐든 고객의 전화에 욕설로 대응했으니 문제가
심각했다. 당장 마무리를 해야 할 보고서가 떠오른 그녀는 일단 일은 벌어졌으니 수습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우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서준을 오후 반차 처리를 하고 사무실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 뒤에는 해당고객의 기존 통화내역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그녀가 기록을 남긴 코드 블랙이셨다.
분명히 서준도 그녀가 해둔 표시를 보았을 테고 아침마다 강조를 해왔었는데 아무래도 스스로 대처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서 그녀는 안타까웠다.
서준을 사무실에서 내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문제의 코드 블랙님께서 사무실로 친히 왕림을 하셨다.
상담센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가 소리쳤다.
-"아까 그놈 나와."
민정이 블랙에게 빠르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책임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못 미더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본 블랙이 씩씩거리는 과호흡을 걸음걸음마다 내뱉으며 팀장실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수진이 냉큼 차가운 음료 두 잔을 팀장실 탁자에 올려둔 뒤 사라졌고 민정은 블랙에게 앉으시라며 의자를 권했다.
-"아니.. 세상에 고객한테 개새끼라고 하는 상담원이 어딨어?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블랙이 마구 화를 내는 동안 민정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쌍욕을 더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블랙이 목이 타는지 음료를 마시며 잠시 음소거가
되는 순간 민정이 그의 앞에 그녀가 만들어놓은 통화기록 일지를 내밀었다.
"고객님, 저희 직원이 고객님께 '개. '새. 끼'라고 한 부분은 진심으로 백배사죄드립니다.
해당 직원은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
-"그렇지. 그 새끼 잘라버려."
"네네.. 고객님 '잘라버려'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객님께서 오늘 해당 직원에게 하신 '고추를 따불제'는 어떻게 할까요.
여기 기록 보시죠."
그녀가 그의 앞에 놓인 용지를 한 장 넘기며 한 부분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보시면 고객님 지난 2000년 06월 21일 오전 10시 38분에 저희 상담센터에 전화하셔서
이 동그라미 보이시죠. XXX XXXX XXXX라고 하신 내용이 있죠.
그럼 다음장 보시죠. 2000년 06월 29일 오전 9시 24분에 전화하셔서 업무와 관련 없는
네네 동그라미 부분요. XXXX XXXX XXXX라고 하셨네요.
또 볼까요......"
열다섯 장이 넘는 종이에 각 장별로 상세하게 기록된 폭언 및 성희롱에 대한 기록을 직접 확인한 블랙은
말이 없었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몇 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양으로 남은 기록을 본 그는 남은 패기를 짜 모아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도 직원이 개새끼라고 하면 안 되제."
"네네. 그럼요. 고객님 저희가 해당 직원을 그래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럼 고객님은요. 이 내용으로 성희롱 고소 가능한 건 알고 계시죠?
어떻게 저희가 더 도와드릴 내용이 있을까요?"
분기탱천해서 일층에 있는 보안팀의 제제도 뚫고 고객상담센터 내부까지 난입했던 블랙은 조용히 퇴장했다.
고객님의 가시는 길은 한민정팀장이 극진하게 엘리베이터까지 안내를 하며 배웅해 드렸다.
해당 사건은 평소 한민정 팀장을 공공연하게 미워하던 고객상담센터 2팀 팀장에 의해 인사팀에 전달되었고
한팀장의 자료제시와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서준은 고객에 대한 폭언으로 경고를 한팀장은 직원관리부실을 이유로 경고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