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러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객상담 2팀과 3팀의 팀장이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코드 블랙이니 뭐니 설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참 시기적절하죠. 딱 인사고과 달에 일이 터졌으니.
한팀장 밟고 김팀장님이 올라가는 건 기정사실 아닌가요."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은 민정은 일부러 탕비실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열린 문소리에 놀란 그들이 말을 멈추고 문쪽을 바라보고는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 헛기침을
한 김팀장이 그녀에게 빈정댔다.
"아참.. 한팀장 그런데 곧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예비신랑 직장도 좋다며 이참에 얌전하게 주부로 직업을 바꾸는 건 어때?
잘할 것 같은데?"
김팀장의 말에 민정이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알아보니 결혼할 놈이 딱 김팀장 같은 놈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찼어요."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김팀장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그녀 앞에 마주 섰다. 민정은 그가 멱살을 잡으면 자신도 멱살을 잡을 생각으로 그와 팽팽하게 맞섰다. 중간에서 안절부절못하던 3팀장이 곧 터질 것 같은 김팀장을 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팀장은 끌려나가면서도 그녀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그래. 너 같은 것이 어디 시집가나 두고 보자."
탕비실에 소란이 일자 무슨 일인가 싶은 팀원들이 고개를 들어 탕비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히 자신 때문에 징계를 받은 팀장이 맘에 걸렸던 서준은 아에 자리에서 서서 탕비실 쪽을 살폈다.
그녀는 주위 시선은 무시한 채 커피머신 아래 컵을 내려놓고 진한 커피 버튼을 누른 뒤 커피를 기다렸다.
커피가 주르륵 내려오는 순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커피와 함께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마시고라도 잠을 자야겠어. 이 상태로는 무리야.'
회사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간신히 퇴근시간까지 버틴 민정은 퇴근길에 집 앞 슈퍼에 들러 소주를 세 병
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소주부터 집어넣은 그녀는 서둘러 씻고는 참치 통조림 한 캔과 김치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둔 소주 한 병을 꺼내서 식탁에 앉았다. 그녀가 소주를 따라 한 잔을 마시려던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민정의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이 시집도 못 가는 년이 또 술을 쳐 먹네."
민정은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따른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빈 속을 타고 흐르며 위장을 적시는 소주
한잔이 꼭 자신의 눈물만 같았다. 불면증만 아니라면 되도록 술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경정신과에서 수면유도제를 처방받는다면 분명 회사 인사팀에 진료기록이 남을 것이 뻔하기에 당장 잠을 자려면 술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년이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무시해? 그때도 지 아비 편들더니 돈 번다고 유세하냐?"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화를 풀기로 작정한 듯한 엄마를 그제야 고개를 들고 쳐다본 민정이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약을 먹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엄만데.... 엄만 왜 그걸 모를까.
아빠라도 도망 보낸 게 다행일까......'
어린 시절부터 민정의 소원은 단 한 가지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공부를 잘하고 부모님의 말을 잘 들어도 산타에게 기도하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부처님께 기도해도 그녀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엄마는 성격이 아주 많이 급했다. 본인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치미는 화를 참지 못했고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배우자이자 민정의 아버지인 남편이었다. 말수가 적고 평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는 엄마에게 만만한 화풀이 대상이었고 우편배달부인 그는 그런 여자와 결혼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자신의 딸을 위해 참는 쪽을 택했다.
민정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의 가족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학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녀의 눈에 대문가에 나와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가 보였다. 반갑게 다가온 그녀를 의식하지 못한 채 깊이 생각에 잠겨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는 뒤늦게 자신 앞에 서 있는 민정을 발견하고는 담배를 서둘러 비벼 끈 뒤 손을 등 뒤로 감췄다.
하지만 민정은 러닝 차림의 아버지 팔뚝에 길게 긁힌 손톱 자국을 보고 난 뒤였다.
그녀는 그대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 앞 슈퍼로 갔다. 슈퍼 간이 테이블 의자에 아버지를 앉힌 그녀는 슈퍼에 들어가 슈퍼주인에게 아버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과 종이컵 그리고 과자 한봉을 사서 간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소주를 따서 종이컵 두 개에 나눠 따른 그녀가 그중 한 잔을 아버지 앞에 놓아주고는 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그녀가 주는 소주 한 컵을 한 번에 들이마신 아버지의 눈에서 봇물터진 눈물이 흘렀다.
-"민정아. 너한테 미안한데 더는 안 되겠다."
아버지는 본인이 잘하면 엄마가 달라질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고 그 믿음이 깨진 뒤에는 민정을 결손가정 아이로 만들기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에 너무나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도 한 번쯤은 행복해지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민정과 그녀의 엄마에게 납득시키기도 전에 엄마한테 들키고 말았다며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아빠. 나도 불행한 아빠는 더는 싫어. 날 위해서라는 말도 하지 마.
그냥 엄마하고 헤어져.
그리고 이제 행복해져."
아버지가 엄마와 이혼한 뒤 엄마의 화풀이 대상은 딸인 민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