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필요해.

7화. 서준의 결근.

by 묭롶

바깥은 불볕더위로 이글거렸지만 짙은 선팅으로 자외선이 차단된 상담센터 안은 바깥의 날씨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선선했다. 상담센터 메인서버실과 같은 층을 쓰는 고객 상담센터 1팀은 각종 전산장비의 발열을

막기 위해 냉방장치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날도 1팀 직원들은 불타는 열화지옥을 뚫고 나가 외부에서 점심을 먹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있는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편을 택했다.


민정이 팀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던 도중 서준의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신인을 확인한 서준은 밥을 먹던 도중 일어나서 황급히 식당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만 팀원들이 점심을 다 먹은 뒤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식기를 대신 정리한 민정이 팀원들과 7층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서준은

상담센터 안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이는 그의 모습에 민정은 걱정이 됐지만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어서 눈으로 그를 살핀 후 팀장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정신없이 오후 업무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을 때는 이미 오후 여섯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쭈욱 켠 민정이 컴퓨터를 끄고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 신은 뒤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팀원들은 이미 여섯 시에 모두 퇴근을 해서 상담센터 내부는 비어 있었고 상담부스를 가로질러 퇴근을 하던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서준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대로 두어 발짝을 걷던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준의 책상에 놓여있던 여직원들의 기선을 꺾어놓았던 그와 여자친구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자리에 없었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서준의 아버지는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서준 엄마의 따귀를 갈겼다. 어이쿠 소리를 내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서준엄마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방 한구석으로 앉음 걸음으로 물러나 몸을 웅크렸다.


"왜. 엄마한테 그래?"


서준이 일어서서 엄마에게 다가가는 아버지의 주먹을 움켜쥐고 붙들었다.


"뭐? 사진학과? 사진이 돈 벌어준다디?

자식이 이 모양이면 에미라도 나서서 말려야지.

아이그. 저 병신 같은 년이."


서준엄마에게 발길질을 하려는 아버지를 온몸으로 막아선 서준이 넌더리가 난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래, 시키는 대로 행정학과 갈 테니 엄마 좀 그만 때려."




미처 다 먹지도 못한 점심 식판을 그대로 놓아두고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은 서준은 멍하기만 했다.


"미안해, 나 곧 결혼해."


유리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왔지만 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행정학과에 가지 않았더라면 난 어떻게 됐을까.'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유리는 세운대학교 행정학과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결핍이라고는 겪어보지 못한 어린 왕자가 키우는 유리병 속의 장미꽃 같은 그녀의 모습에 한눈에 반한 서준이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고 그들은 대학 내에서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서준이 대학교 일 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에도 그를 살뜰히 챙겨준 유리였기에 그는 앞으로의 미래에 그녀가 없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함께 공부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행정고시를 같이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가 7급 공무원에 합격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커트라인과는 많이 벌어지는 그의 점수는 그의 발목을 과거에 붙들어놓았지만 연수를 마친 후 국가직 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은 유리는 날개를 달고 미래로 날아가고 있었다.


고위 교육공무원인 유리의 부모님은 그녀의 7급 합격 이후 결혼을 서둘렀고 이제 어떻게든 내놓을 만한 직장이 필요해진 서준은 궁여지책으로 아이피생명 상담센터 직원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입사 이후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할 테니 믿고 기다려달라고 유리를 설득했지만 그녀와의 통화는 갈수록

힘들어졌다. 그런데 오늘 점심때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녀는 서울특별시청 자치행정과 5급 사무관과 올 겨울에 결혼 한다고 했다. 대학교를 입학할 때는 아버지가 그의 날개를 꺾었고 이제 사회생활의 출발점을 디딘 그를 이번에는 그녀가 저 아래 환멸과 증오의 지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의 꿈을 꺾은 아버지는 그가 군 제대를 몇 달 앞둔 봄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는 다시 한번 고민을

했다. 복학을 하는 그때가 바로 전과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 시절 그에게는 그와 미래를 함께

할 유리가 있었다. 이제 그에겐 산산조각 난 현재만이 존재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은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서준이 여섯 시가 되자 유령처럼 몸을 일으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한 민정은 아침 회의 시간까지 서준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지난번 징계에 무단결근이 더해지면 상황이 심각해질 것을 예측한 그녀는 그로부터 사전에 아파서 하루 결근할 것을 연락받았다며 근태보고를 했다. 점심시간에 그녀는 인사기록 파일을 열어 서준의 집 주소를

확보했다. 퇴근 후 그의 집으로 향한 그녀는 그의 아파트 앞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아파트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바라보며 갈등했다.


'이건 뭐 학교 안 나오는 학생 찾아 나선 담임교사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일까.

아니야. 이제 첫 직장인데 이런 식으로 회사를 그만두면 이 친구는 앞으로 아무것도 못하게 될 거야.'


마침내 결심을 굳힌 그녀가 아파트 출입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두 번까지만 눌러보고 난 돌아갈 거야.'


초인종이 두 번째 길게 울렸을 때 안에서 딸깍하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마른 육십은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아... 네.. 어머니. 전 김서준 씨가 다니는 회사 팀장이에요.

업무관련해서 의논할 일이 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참외 한 상자를 서준엄마에게 건네자 어찌할 줄 모르고 참외를 받아든 서준엄마가

고개를 돌려 서준을 부르기 시작했다.

집까지 찾아온 팀장에 놀라 눈이 커진 서준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자신을 쳐다보는 엄마를 피하려는지 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는 팀장을 잡아끌고 아파트 현관문 바깥으로 나왔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건가요?"


화가 나 보이는 서준의 얼굴을 보며 씩 웃은 민정이 그에게 말했다.


"밥이나 먹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