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에 서준을 남겨두고 길을 먼저 나선 민정은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달리는 지하철 차창에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민정은 차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집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가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인데 '집'이 가까워올수록 '집'에 가고 싶지가 않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그순간 그녀는 어쩌면 애초에 그런 놈인 줄 어느 정도는 알아챘지만 어떻게든 '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결혼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고객상담센터 2팀의 김팀장을 닮은 그놈을 처음 만난 곳은 골프 연습장이었다.
운동을 워낙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상담팀 본부장이 워낙에 골프를 좋아하다 보니 상담센터 팀장들은
어쩔 수 없이 주말이면 본부장을 모시고 라운딩을 가야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속 상사에게 맞추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에 민정은 개인레슨을 병행해야 했다. 뭐든지 열심히 끈질기게 집중하는
그녀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골프공은 다른 구기 종목처럼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대신 그 자리에서 그녀가 쳐주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엄청난 반복 학습을 통해 공을 맞추는 각도를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날도 그녀가 때리는 샷은 연방 '팡' , '팡' 호쾌한 소리를 곁들어 긴 비거리를 선보이며 연습장 상단부 그물을 때렸다. 그때 옆에서 박수소리와 함께 '나이스 샷'이라고 외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고 있던 드라이버를 손에 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제법 유명한 브랜드의 골프웨어를 입은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바지 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그녀에게 명함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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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을 건네받은 그녀가 명함을 눈으로 보고 가볍게 '아. 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을 꽤 열심히 하시던데요. 스코어는 몇이나 되세요?"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스코어라 할 것 도 없어요. 머리도 이제 얹은 걸요."
-"폼이 좋아서 금방 늘겠어요."
대학교를 다닐 때는 워낙 화목하지 못했던 집안 탓에 비혼을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남자를 만날 생각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는 자신을 남자동료처럼 대하는 직원들 탓에 남자를 사귈 기회도 없었다. 지금처럼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는 처음이어서 그녀는 마냥 신기했고 한편으론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저 남자가 왜 나를 만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는 그 남자의 취향이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게 골프 연습장에서 함께 연습을 하며 친해진 이후에 그는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정문 앞에서
꽃을 들고 그녀를 기다렸다. 이내 회사에는 남직원(민정의 별명)이 남자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그 남자와 만난 지 육 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 남자가 그녀에게 결혼얘기를 꺼냈다.
민정은 남자에게 자신의 집안사정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괜찮겠냐며 물었다. 흔쾌히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래도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가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기뻤던 것은 이제 결혼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엄마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봄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그녀의 얼굴이 곧 있게 될 좋은 소식의 안내문처럼 회사에 그녀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만들어갔다.
남자는 그녀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민정 씨 이제 결혼을 하게 되면 내가 집을 해올 거니까 자기도 나한테 뭐 하나만 해주면 안 될까?"
"뭐가 갖고 싶은데요?"
-"나 갖고 싶은 차가 있는데....."
"그래요. 어차피 결혼하면 차도 한대 필요하니까 뽑죠."
남자는 벤츠 E클래스를 본인명의로 구매해 달라며 민정을 졸랐지만 그녀는 결혼할 때 집은 남자 명의로 할 거니 차는 본인 명의로 구매하고 운행은 남자가 하면 된다고 말했다. 매사 확실한 민정의 성격은 한 번 말한 것을 번복하는 법이 거의 없어서 남자는 별 수 없이 그녀 명의로 차를 등록했고 그녀에게서 차키를 전달받았다.
차키를 전달받은 뒤 남자는 연락이 뜸해졌다. 연락이 되지 않는 남자가 걱정이 됐던 민정이 그의 명함에 적혀있는 직장으로 전화를 했을 때 그녀는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잘 나가는 여의도 증권맨이라는 그는 사실 정직원이 아닌 건당 수수료를 받는 프리랜서였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소문도 좋지가 않았다. 회사에는 이미 그녀의 결혼이 기정사실처럼 알려져서 수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골머리를 앓던 어느 날 그녀의 스마트 폰 진동이 울렸다. 바로 문제의 그 남자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너 나 차 할부로 사줬냐?"
"K캐피털에서 압류 들어갔지?"
-"히야. 정말... 놀랐다. 차에 설정도 했더라."
"응... 내가 살면서 행운이란 걸 누려보질 못해서 말이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네.
내가 일부러 할부금을 계속 안 냈어.
아니. 애초에 내 신용이면 설정을 안 해도 되는데 일부러 해달라고 했어.
넉 달 연체하니 바로 앞 번호판 떼어갔지?
-"너 같이 뚱뚱한 년 하고 연애를 해주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재수가 없으려니.."
"응... 곧 네가 재수가 없을 거야.
널 일단은 찾아야 그다음을 진행하지.
차 위치 확보 됐으니까 내일 당장 도난신고 들어갈 거야."
-"이거 정말 무서운 년이네. 무서워서 누가 너랑 살겠냐?"
"그런 거 걱정 안 해줘도 되니까 더한 거 겪기 전에 차 앞바퀴 위에 차키 얹어두고 꺼져."
주기적으로 덜그럭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차창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은 왜 남자의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을까?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랐기 때문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그 남자가 차를 사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일말의 의심이 들었지만 엄마를 떠올리며 의심을 애써 지우려 했다. 하지만 매사에 용의주도한 그녀는 결국 만약과 혹시라는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이 사기로 드러난 이후 그녀는 그 남자가 의도적으로 골프연습장에서부터 접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리 그녀의 직장정보를 확인한 그가 자신이 연애를 제안하면 감지덕지할 것만 같은 그녀를 쉽게 생각하고 차를 얻어낸 다음 그 차를 되팔아 돈을 갈취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녀를 확인한 그는 차선책으로 차를 팔지는 못하지만 오래오래 타고 다니기로 계획을 수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상상이상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대학시절 복수전공으로 법학을 공부했다는 사실까지는 그가 수집한 정보에 없었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사고를 치고 다니는 엄마를 십 년 가까이 수습해 온 그녀의 사고 수습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남자는 육 개월을 공들여 얻어낸 차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하지만 벤츠를 다시 찾아와 중고로 판매를 했지만 처음 등록 시 들어간 등록비용과 연체료 그리고 시세차액
삼천만 원은 그대로 그녀의 인생교육비로 지불되었다.
그냥 날아가버린 삼천만 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젓던 민정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완벽한 내 편을 만들어서 엄마로부터 독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