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결근했던 서준은 팀장이 찾아왔던 그날 저녁 이후로 회사를 가는 마음이 그전과는 달라졌다.
그전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억지춘향이었다면 팀장을 만난 이후로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어졌다.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생기자 직장생활은 여전히 힘들지만 그전처럼 정신이 병드는것 만 같은 느낌은 사라졌다. 그는 한민정 팀장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상담전화를 받는 그의 첫 음성에서부터 목소리에 적극성이 묻어나기 시작하자 상담전화를 건 고객들도 그의 전화응대에 만족도가 높아졌다. 응대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해서 그의 자신감도 동반 상승되었다.
그날도 서준은 울리는 상담콜을 신속하게 받아서 응대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행복을 드리는 아이피생명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이 말하는 통화내용을 듣는 서준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그는 고객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해당 전화를 한민정 팀장에게 인터폰으로 연결했다.
-"팀장님 아무래도 이건 좀 이상해서 전화를 받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제가 받아볼게요."
연결된 인터폰 버턴을 즉시 눌러 전화를 받은 민정이 전화 수화기를 귀에 대고 고객에게 말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문의 내용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 주저하는 목소리로 중년은 되어 보이는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제가 약관대출을 받아서 그 돈을 주면 매달 십 프로씩을 준다고 했는데 석 달째 돈이
안 들어와서요."
"고객님, 실례지만 그 돈을 누구를 주셨단 말씀이실까요?"
-"미셀한테 줬지요."
"고객님 그럼 미셀 FC가 대출금을 받는 조건으로 이자를 주기로 했다는 말씀이실까요?"
민정은 고객의 말을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뭔가가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관계 파악이 먼저라고 판단한 그녀는 일단 고객 응대를 마무리해야 했다.
"고객님, 문의하신 내용관련해서는 사실관계를 확인 후 고객님께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미셀이 전화도 안 받고 나 그 돈 잘못되면 집에서 쫓겨나요. 빨리 연락 줘요."
"네. 고객님 빠른 시간 내에 회신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민정 팀장이었습니다."
고객과의 통화가 마무리된 후 민정은 잠시 망설였다.
미셀 FC는 아이피생명의 간판 FC(미래투자 설계자)였다. 미국 시민권자로 텍사스주립대를 졸업한 그녀는
화려한 외모와 멋진 몸매를 지닌 미혼의 여성으로 아이피생명에 입사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보험 판매율 TOP 10을 찍었다. 이후 그녀는 각종 강연과 사내 홍보 모델뿐만 아니라 신입 FC교육에도 참여했다.
그녀는 그런 미셀이 뭐가 아쉽다고 이런 전화를 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단순히 고객의 오해라고 치부하기엔 전후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매사 명확한 결론을 내야만 속이 시원한 평소 성격에 못 이긴 그녀는 해당 통화의 녹음파일을 자신의 입사동기인 추심팀 이팀장에게 보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업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민정의 인터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리는 인터폰의 내선번호를 먼저 눈으로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네. 본부장님." (영업팀 본부장 직통 인터폰 번호였다.)
-"한 팀장, 당장 들어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본부장의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쾅하고 내려놓는 수화기 소리에 민정은
귀가 아팠다.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걸치고 구두로 갈아 신은 뒤 업무용 태블릿을 들고 팀장실을 나섰다. 고객상담센터 자동문을 통과해 본부장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그녀를 상담센터 2팀장인 김팀장이 고개를 쭈욱 빼어 들고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노크를 한 뒤 그녀가 영업팀 본부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본부장뿐만 아니라 미셀 FC도 함께 있었다.
-"자네. 지금 우리 영업팀을 뭘로 보는 건가?
자네 팀에서 설치다 경고 먹은 걸로 부족했어?
영업팀 아니면 아이피생명이 어찌 먹고살아?"
--"아유. 본부장님 말도 마세요. 그 고객 허언증이 심해서 제가 오죽하면 전화를 차단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전후관계 알아보지도 않고 추심팀으로 토스하는 게 제정신이야?"
자리에서 일어서서 노발대발 흥분하는 영업팀 본부장 옆에서 미셀 FC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민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가 외모가 뛰어나다 보니 참 별것 아닌 것들까지 저를 스크레치를 내려고 하더라고요.
부러우면 부럽다고 인정하지 왜 이런 식인지 저도 참 이해가 안돼요."
민정은 일어선 본부장이 잔에 담긴 물을 마시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아이피생명에서 영업팀은 가장 중요한 조직입니다. 하지만 고객상담센터를 맡고 있는 저는
제 직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내용은 사실관계의 확인이 우선이고 그 사실을 기반으로 고객의
불만이든 오해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
-"말이 청산유수네. 자네가 차라리 FC를 하지 그래. 집어치우고 이건은 미셀이 고객에게
직접 해명한다니까 그렇게 알고 나가."
민정은 나가라며 손짓하는 영업팀 본부장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두통의 조짐이 보이는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한 손가락으로 눌러 문지르면서 다른 손가락으로 인터폰을 눌러 추심팀 이팀장에게 내선전화를 걸었다.
-"김팀장이 그새 영업팀에 고자질한 눈치던데. 너 괜찮냐?"
"괜찮을 리가 있겠냐. 요즘 연일 여기저기서 개박살이다."
-"그러게. 몸 좀 사려. 어쩌려고 그래.
이미 인사고과도 물먹어서 김팀장만 신났던데."
"그런데 느낌이 안 좋아. 미셀 FC 고객들 최근 약관대출 내역 좀 찾아봐."
-"야.. 나는 살아야지.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암튼... 너도 좀 알아봐."
그녀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한 이팀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그녀도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머리를 강타하는 두통에 그녀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그녀는 두통약을 손에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서준이 텀블러에 차를 타기 위해 탕비실로 갔을 때 그 안에는 상담센터 2 팀장과 3 팀장이 먼저 와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목례를 한 그가 정수기 아래 텀블러를 놓고 온수 버튼을 눌렀을 때 3 팀장이
뭐라고 했는지 크게 웃는 2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남자한테 차이더니 이제 자기보다 예쁜 여자는 다 미운가 봐.
멀쩡한 미셀을 걸고넘어지게.
꼭 못생긴 것들이 그러더라고."
자신의 팀장을 뒷담화하는 김팀장의 말이 귀에 거슬린 서준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람 없는데서 그렇게 말하면 비겁한 거 아닌가요."
"어쭈, 꼴에 지 팀장이라고 싸고 도네.
너도 조심해 어? 다음번엔 경고로 안 끝나는 수가 있어."
김팀장의 말에 욱한 서준이 그에게 다가서려 할 때 탕비실 밖에 있던 민정이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김팀장을 마주 본 민정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팀장이나 조심해. 응? 이렇게 업무시간에 맨날 노닥거리는 거
위에선 아나 몰라. 왜 얘기해 줘?"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힌 김팀장과 제 발 저린 3 팀장은 급히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들이 나감과 동시에 정수기 아래 놓인 서준의 텀블러를 옆으로 옮긴 뒤 찬물을 한 컵 받기가 무섭게 알약을 들이켰다. 서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리고 앞으로 저런 못난 사람들 상대하지 마요. 알았죠?
이제 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