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 들어선 민정은 입구에 서서 자리에 앉은 임원들에게 인사를 한 뒤 추심팀 이팀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사장이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왔고 앉아있던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사장을 맞이했다. 부사장이 상석에 앉은 뒤 이팀장이 앞으로 나와서 대책회의를 진행했다.
곧이어 프레젠테이션 용 대형 스크린에 PPT자료가 비쳤다.
성명: 미셀 리
국적: 미국 디트로이트 출생
나이: 35
학력: 이력서에 제출된 텍사스 주립대 졸업증명서는 위조로 판명
실제로는 애리조나 퀸 크릭 고등학교 졸업.
전적: 맨해튼 월 스트리트 거리에 위치한 시크릿펍의 바텐더.
이팀장은 화면에 표시된 내용을 부연설명했다.
"미셀 리는 증권맨들이 주 고객층인 펍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그곳에서 들은 정보를 이용해 교포들을 대상으로 금융사기를 저질렀고 수사가 진행되기 직전 한국으로 도피한 뒤 위조한 경력으로 아이피 생명에 입사했습니다. 다음장을 보시죠."
사고액 : 보험 사고액-40억 추정, 개인 사고액-5 억 추정(영업팀 본부장 개인 투자 3억 포함)
사고 경위 : 입사 이후 퇴직한 FC의 보험 가입 고객 중 장기고객을 대상으로 높은 이자를 미끼로
고객이 약관대출을 받게 한 뒤 대출금을 갈취.
현란한 언변으로 미국 내 증시 상황에 대한 정보를 흘려 주식투자를 미끼로 투자금을 갈취.
부사장은 화면의 내용만 보고도 머리가 아파 보였다.
"그래서 지금 대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노기가 실린 부사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회의실에는 적막이 흘렀고 브리핑을 하던 이팀장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이마를 손으로 문질러 식은땀을 닦은 이팀장이 다음 시트로 화면을 전환했다.
*대책방안*
1. 신원확보 - 미국으로 티켓팅된 미셀 리의 항공예약 기록이 확인된 바 현재 법무팀이 법원에 사건을 접수한 뒤 미국에 범죄인 인도 요청 진행 중.
2. 언론대응 - 보험 사고 소식이 언론에 전달되지 않도록 홍보팀을 통해 각 언론사의 동향을 실시간 체크.
3. 고객대응 - 법무팀을 통한 사고 고객 안내문 내용증명 발송.
4. 전수조사 - 미셀 리의 보험 가입 고객 중 추가 피해 사실 여부를 전수 조사를 통해 확인.
"현재 보시는 것처럼 가장 시급한 것은 미셀 리의 신원확보입니다.
이미 법무팀을 통해 확인한대로 해당 보험 사고는 미셀 리 개인이 고객을 부추겨 사기를 저지른 것으로
당사는 고객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 고객이 해당 사실을 언론사에 흘릴 경우
당사가 입게 될 우형, 무형의 피해는 막대합니다.
법무팀이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피고가 없는 상태에서는 재판이 불가능하며
조사한 바로는 미셀 리의 국내 자산은 없는 상태로 추심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럼 손 놓고 당해야 한다는 건가?"
부사장의 음성이 또 한 번 격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사건 터지기 전에 고객상담팀에서 문제제기가 있었다던데...
이팀장. 한팀장이 녹음 파일을 전하면서 미셀 관련 건 확인요청을 했다는데
이건 왜 확인이 안 된 거야?"
이팀장이 부사장의 말에 다급히 대답을 했다.
"고객상담센터 1팀장인 한팀장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영업팀 본부장이 클레임을 걸었고
상급자의 직권으로 스톱시킨 내용이라 당시 추가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한 팀장 자리에 와 있는가?"
"네. 부사장님, 제가 고객상담센터 1팀장인 한민정입니다."
부사장이 민정을 눈여겨보았다.
-"자네가 사고를 예측했다면 수습방안도 구상해 봤을 테지.
지금 자료 내용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나?"
부사장의 말에 회의실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민정에게 집중되었다.
"먼저 미셀 리가 미국 항공권을 예약한 것은 트릭입니다.
미국 내 수사가 시작된 직후 도피를 했기 때문에 미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갔다는 거지?"
"미셀 리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티켓팅했다면 그건 필시 타 국가를 경유하는
경유 항공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네는 그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나?"
"제 추측으로는 싱가포르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싱가포르는 대한민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이 맺어지지 않은 국가이고 영어생활권이면서 제3국으로의
추가 도피가 가능한 곳입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당사 1층에 있는 시티 은행에서 미셀 리가 싱가포르 시티은행으로 보내는 해외송금
전표를 작성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민정의 구체적이고 간결한 대답을 듣는 부사장의 표정이 진지해졌고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은 왜 자신은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 건은 자네가 맡는 게 좋겠군.
법무팀, 추심팀과 협력해서 이 일을 수습해 보게.
당장 인사팀에 한팀장을 책임자로 발령 내도록.
그렇게 민정은 하루아침에 추심팀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그녀의 발령 소식은 고객상담센터 팀원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았다.
병가로 보름을 쉰 팀장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던 팀원들은 앉은자리에서 자신들의 팀장을 뺏긴 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문책인사를 받은 영업팀 본부장이 신임 팀장으로 배치되었으니 그녀의 송별회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서준은 의지할 지지대를 잃은 꼴이어서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서운해서 한잔, 미련이 남아서 한잔, 속상해서 또 한잔 그렇게 마신 술들이 팀원들을 집어삼켰고 민정은 속상해하는 팀원들을 달래느라 술을 마실 새가 없었다. 제일 정신이 멀쩡한 민정이 팀원들을 한 명씩 택시에 태워 보내고 서준만 식당 입구에 주저앉아 졸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부축해서 일으킬 때 술에 잔뜩 취한 서준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
-"팀장님 가지 마세요."
순간 민정의 머릿속에 완전한 내 편 만들기 계획이 떠올랐고 그녀는 서준을 부축해서 식당 인근에 있는
무인모텔로 들어갔다. 새벽에 모텔을 먼저 빠져나오기 전 그녀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서준의 얼굴을 보며 죄책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