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 애냐?"
아이가 생겼다고 민정이 그녀의 엄마에게 얘기했을 때 엄마는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부터 물었다.
"아니야. 내가 그런 놈 애를 가졌겠어?"
-"그럼, 누구야?"
"아이 아버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아이가 필요해."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왜 애가 필요해. 난 네가 시킨 대로 다했다.
병원도 가고 약도 먹어. 도대체 왜 그러는데?"
"엄마도 알지. 나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나 요즘 잠도 잘 자고
너무 행복해. 이제야 완전한 내편이 생긴 것 같아.
이 아이는 나하고는 정 반대로 키울 거야."
서준과 민정이 한정식 집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날부터 서준은 회사 로비에서 퇴근하는 그녀를 기다렸다. 로비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민정과 함께 회사를 빠져나가는 서준의 모습에 놀라서 서로를 붙잡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직원들을 뒤로 한채 민정의 손을 잡은 서준은 걷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민정 씨, 집에 가야죠."
"지금, 팀장님이 아니고 민정 씨라고 했어요?"
-"그럼 지금 제가 가족이지 회사 부하직원인가요?"
그녀가 생각해 보니 서준의 말이 맞았다.
"우리 엄마가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달라요. 괜찮겠어요?"
-"어차피 계속 만나야 할 분이라면 피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아파트 입구 과일가게에서 과일 바구니를 포장해서 손에 든 서준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가
아파트 현관 출입문에 들어섰다. 주방에서 국을 끓이던 민정의 엄마는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들어서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누구세요?"
손에 국자를 든 채로 민정의 엄마가 얼떨떨하게 둘 중 누구에게 묻는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물었다.
"엄마... 그게......"
-"어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이 아이 아버지입니다."
민정의 부푼 배를 손으로 가리킨 서준이 당당하게 말하고는 과일바구니를 그녀의 엄마에게 건넸다.
놀라서 말문이 막힌 그녀의 엄마는 과일바구니를 받아 식탁 옆에 내려놓고는 서준을 뚫어져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연예도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멍청인 줄 알았더니 어디서 이렇게 멀쩡하게 아니
잘생긴 얘를 만난 거야?'
서준을 쳐다보던 그녀의 엄마가 이번에는 물음표가 오만 개쯤 떠오른 표정으로 자신의 딸을 쳐다보았다.
엄마의 노골적인 시선에 무안해진 민정이 손사래를 치며 엄마를 식탁의자에 앉혔다.
"엄마.. 궁금한 건 차차 얘기할 테니 밥부터 먹자고."
민정은 손을 씻기 위해 양복 재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그가 오늘 자신의 집에 올 계획으로 양복까지 입고 출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아버지가 되었지만 태어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믿음직하고
든든해서 민정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엄마는 어떻게 된 거냐고 계속 물어왔다.
"엄마.. 실은 나도 이게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저 친구가 아이 아버지는 맞아."
욕실에서 나와 식탁 의자에 앉은 서준은 익숙하게 수저통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빼내어 그녀의 엄마와 민정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는 젓가락질이 서툰 민정을 대신해서 그녀가 포기하고 수저로 떠먹으려는 콩자반을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놓아주었다. 그런 그의 세심한 모습을 보며 민정의 엄마는 젓가락질도 못하는 병신 같은 년이라고 욕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다시 후회가 되었다. 순간 엄마는 자신과는 정 반대로 키울 거라며
아이가 필요했다는 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일단. 잘 챙겨주는 놈이군. 생긴 것도 괜찮고.'
어찌 됐든 민정만 좋다면 자신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엄마였다. 그렇게 서준은 매일 저녁 그녀와 함께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고 그녀와 운동삼아 산책을 다녀온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배가 불러오는 탓이기도 했지만 매일 늦는 그녀의 퇴근 시간 때문에 바깥에서의 데이트도 쉽지 않은 상황이 민정은 못내
서준에게 미안했지만 자신에게 매번 맞춰주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마음을 기대기 시작했다.
그날도 손을 잡고 저녁 산책을 하던 중 벤치에 앉아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서준이 시선을 돌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도 그를 마주 보았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 손을 잡고 옆에 있어주는 것 말고는요."
"괜찮아요. 난 당신과 우리 사랑이만 있으면 돼요."
-"당신과 결혼을 하고 싶어도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자신의 눈을 비볐다.
"결혼요?"
-"곧 태어날 아이 출생신고도 해야잖아요?"
사실 서준을 매일 만나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커져감을 느끼는 그녀였지만 자신이 그를 욕심내는 것이 자신만을 위한 일일까 걱정이 됐던 그녀는 결혼까지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결혼을 얘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감동이었다.
"뭐가 중요해요. 우리가 한 가족으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해요."
그렇게 만삭인 탓에 결혼식을 미룬 그들은 혼인신고부터 먼저 했다. 아파트는 민정의 아파트를 팔아 그녀의 엄마를 좀 더 작은 평수로 옮기고 그동안 모아놓은 금액을 보태 서울 변두리에 전세를 얻었다. 서준은 살림살이를 준비했고 서준의 엄마는 그 사실을 너무 미안해했지만 그녀도 민정의 엄마도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민정의 마음을 알기에 민정의 엄마는 그녀가 하는 말에 무조건 동의했다.
아이피 생명 내에서 그들의 결합은 큰 화제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사건의 주인공이 회사의 킹카까지 획득했다는 사실을 놓고 직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너나없이 그 얘기를 하기에 바빴다.
그녀의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이 없을 거라는 부사장의 약속은 그녀의 출산휴가 공문과 함께 그녀의 차장 승진 인사가 함께 발표됨으로써 지켜졌다. 부사장과의 면담 시 부사장은 민정에게 출산휴가는 길게 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민정의 직무가 오래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어서 출산휴가는 삼 개월만 다녀오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고 그녀 대신 서준이 육아휴직 일 년을 썼다.
자신의 엄마가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자신의 전철을 밟을 수 없었던 그녀는 엄마에게도 오랜시간 학대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은 시어머니에게도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보다 좋은 엄마가 될거라 자신했던 민정이었지만 육아는 회사일처럼 투입한 데이터만큼의 결과치가 나오는 일이 아니었다.
서툰 엄마를 알아보는지 아이도 엄마의 손을 불편해했고 아빠인 서준의 품에서 더 잘 자고 잘 먹었다. 서준이 먼저 육아휴직을 자신이 쓰겠다고 말했을때 민정은 두손 들어 그의 의견을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