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필요해.

17화. 좋은 엄마, 좋은 아빠.

by 묭롶

미셀이 사기, 횡령의 혐의로 구속이 되고 장물 등록된 다이아몬드 세트가 아이피 생명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민정은 정신없이 바빴다.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현금화해서 보험 사고건을 마무리지을 것인지에 대한 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되었고 대책회의에서 부사장은 그녀의 대책안을 채택했다.

민정의 대책안은 다이아몬드 세트를 다시 개별의 다이아로 분해해서 현금화할 경우 상품가치 하락이 우려되므로 해당 세트 일체를 경매를 통해 판매하는 방식을 건의했다. 그렇게 해외 유명 경매 사이트에 등록된 다이아 세트는 올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때마침 열린 칸영화제의 협찬사였던 헤르메스는 레드카펫에서 경쟁사보다 더 높은 비교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자사 엠버서더 모델로 활동 중인 글로벌 탑 스타인 여배우 헬렌에게 최고가의 다이아 세트를 제공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화제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이아 세트 중 목걸이에서 문제를 발견한 헤르메스는 수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급히 대체품을 찾고자 했으나 짧은 시간에 그 정도의 퀄리티를 만족시키는 제품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부속 다이아가 전부 최상급 GIA 보증서로 보증되는 세트를 경매에서 발견한 헤르메스는 당장 구매를 서둘렀다.


다이아세트는 최종 28억에 낙찰되었다. 보험사고액 40억 중 28억을 회수한 아이피생명은 회수금의 처리 방안을 놓고 또 의견이 분분했다. 대책회의에서 여러 의견들이 도출되었지만 부사장은 이번에도 민정의 의견을 채택했다. 채택된 의견에 대한 최종 브리핑 회의에서 회의장 단상에 오른 민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보험 사고 고객들은 이미 지난번 당사에서 발송된 내용증명을 받고

자신들의 약관대출 사기 금액 회수가 어렵다는 점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피 생명이 사고 금액의 60퍼센트를 고객에게 돌려주겠다며 합의서 서명을

요청한다면 서명을 받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방식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사고 고객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고 당사도 고객에 대한 도의를

저버렸다는 불명예를 벗을 수 있으니 양쪽 모두에게 가장 원만한 해결방안이라고 판단됩니다.

물론 이 방안은 우선 사고고객의 10퍼센트를 대상으로 진행 후 결과가 긍정적일 때 나머지

고객에 대해서도 적용예정입니다."


훗날 아이피 생명에서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 사건은 민정이 발견해서 민정이 해결하고 민정이 최종 수습한 것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날도 거의 마무리된 약관대출 사고 고객과의 통화로 오후 시간을 보낸 민정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뒤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섰다. 산부인과 야간진료 예약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구두를 갈아 신고

옷걸이에 걸린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긴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문 로비의 자동문을 통과한 순간 서준이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길이 이제 조금은 태가 나기 시작한 그녀의 배에 머물렀다. 그의 시선을 느낀

민정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말없이 잡은 서준이 그녀를 잡은 채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서준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조용한 한정식 집이었다. 자리에 먼저 앉은 서준이 뒤따라 앉은 그녀에게 놓인

물병의 물을 따라주려다 찬물이 담긴 것을 알고는 벨을 눌러 직원에게 따뜻한 물을 달라고 했다. 식당 직원이 가져온 따뜻한 물을 서준이 그녀 앞에 놓아주자 민정은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왜 그랬어요?"


물컵을 손에 쥔 민정이 그의 말에 하마터면 물을 엎지를 뻔했다. 식탁에 튄 물을 황급히 티슈로 닦은 민정이

한숨을 내리 쉬었다.


"미안해요. 서준 씨를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제 이기적인 판단이었어요."


-"어떤 이기적인 판단이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가져보지 못한 좋은 엄마말이에요.

내가 누려보지 못한 행복을 나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성장기를

내가 내 아이에게 제대로 주고 싶었어요."


그녀가 '좋은 엄마'라는 말을 꺼냈을 때 서준의 머릿속에 평생을 가정폭력에 시달린 자신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과 엄마에게 나쁜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버린 자신의 아빠도 함께 떠올랐다.

말이 없이 표정이 착잡해 보이는 서준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진 민정이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미안해요. 서준 씨한테는 피해 주지 않을게요.

이 아이는 제가 혼자 정말 잘 키울게요.

이 일과 관련해서 서준 씨는 일도 관련이 없게 할게요. 약속해요."


자신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사정하는 민정을 말없이 지켜보던 서준이 벌컥 화를 냈다.


-"왜 제가 관련이 없어요? 그 아이 아빠가 전데요."


옆에 놓여 있던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넨 서준의 눈에 쇼핑백을 열어 그 안에 놓인 스카프를 꺼내든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팀장님이 발령 나서 특별팀으로 가시고 전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그 감정이 뭔지 몰라서 더 혼란스러웠죠.

사무실에 있어도 뭔가가 허전했고 뭔가를 찾게 됐는데 그게 뭔지 몰랐어요.

한참 동안을 생각했어요. 그게 뭔지...

그리고 알았어요. 제가 팀장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일에 관해서는 일사천리 막힘이 없는 민정이었지만 사랑과 연예에 관해서는 일도 모르는 그녀는 서준이 하는 이야기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뱅뱅 맴을 돌고 있는 그의 말들에 둘러싸인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서준 씨, 제가 지금 이야기가 이해가 잘 안돼서요.

지금 제가 필요하다고 한건가요?"


-"맞아요. 전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아 본 적이 없어요.

항상 아빠로부터 엄마를 보호해야 했고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해야 했죠.

하지만 팀장님을 만난 뒤로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을 찾은 것만 같았어요.

알아요.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모든 사랑의 시작이 서로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건 아닐 거예요.

가족으로 시작되는 사랑도 있지 않을까요?

이미 우린 배속의 아이 덕에 아빠와 엄마라는 가족이잖아요."


서준의 입에서 '가족으로 시작되는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민정은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맞아. 지금까지 평범하지 않은 삶도 견뎌낸 나인데 사랑의 시작이 어떻든 그게 무슨 문제일까.

서준의 말처럼 가족으로 시작되는 사랑도 있을 수 있겠지.

나에겐 배 속에 있는 '사랑'이가 필요하고

서준은 내가 필요하고

또 배 속의 '사랑'이에겐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필요하니까....'


생각을 마친 민정이 굳은 의지가 담겨 보이는 서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장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라 우선은 아이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


"서준씨가 그리 말해주니 고마워요.

우리 사랑이도 좋아할거에요."


그렇게 언제나 계획대로 일을 추진해오던 민정의 의도와는 달리 완전한 내편 만들기는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