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M. 쿳시의 자전소설 삼부작 <소년 시절>, <청년 시절>에 <서머타임>을 읽었다. 존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 소피를 통해 “그의 글에 그 주제가 나온다고 해서 그의 삶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순진한 거죠.”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이 작품이 자전소설의 성격을 띤다고 해서 그 작품의 스토리텔링에 작가의 삶을 대입시키는 것에 대한 존 쿳시의 우려를 돌려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서머타임>을 읽으며 과연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문학은 어느 정도의 사실에 허구를 가미해서 만드는 결과물이다. <서머타임> 속 표현대로 본다면 사실을 글쓰기(허구)라는 ‘승화’의 과정을 통해 사실 자체에서 발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낳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뒷 표지에 실린 역자의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고 허구로 현실을 창조하며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현대의 거장 존 쿳시”라는 문구는 <서머타임>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문장이다.
평생 동안 자신의 작품을 작가의 삶과 동일시하려는 문단과 독자들에게 시달렸던 로맹 가리는 <결전의 날>에서[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라는 글을 남기고 자살했다. 자신의 작품 속에 자신을 표현했다는 로맹 가리의 말처럼 존 쿳시의 자전소설 3부작은 그의 문학적 자화상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점묘화로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처럼………..
존 쿳시는 자신의 자전소설 3부작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자의식을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머타임>을 읽고 나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존 쿳시를 나는 만날 수 있었다. 그 어떤 인터뷰로도 드러낼 수 없는 한 작가의 총체성을 <서머타임>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으니 존 쿳시의 문학적 성취가 놀라울 뿐이다.
<서머타임>은 쿳시가 죽고 난 이후 전기작가 빈센트가 쿳시가 미국에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온 1972년부터 첫 소설인 <어둠의 땅>이 출간된 1977년까지의 시간 동안 그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인터뷰한 내용의 기록물이다. 이 작품에는 빈센트가 인터뷰한 쿳시의 사촌 마르곳과 그가 고등학생의 영어지도를 할 시기에 만난 아드리아나, 그리고 케이프타운 대학에 면접을 본 이후 친분을 갖게 된 마틴과 불륜의 관계를 가졌던 줄리아, 또 그의 대학 동료였던 소피 교수와의 인터뷰와 쿳시의 메모들이 수록되어 있다.
[ 그러나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야만인들에게 아이러니는 소금과 같다.
이로 깨물어 순간적인 풍미를 즐길 수도 있지만, 그 풍미가 사라지고 나면 잔인한 사실들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 p28
이로 깨물어 순간적인 풍미를 즐길 수도 있지만,
그 풍미가 사라지고 나면 잔인한 사실들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 p28
쿳시가 남긴 메모와 편지들 속에서 그와 관련된 인물을 찾아가 쿳시에 대한 일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빈센트의 작업은 점묘화의 붓질을 연상시킨다. 무수히 많은 점들로 이뤄진 하나의 작품.
단순히 하나의 점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사실(삶)들이 허구(글쓰기: 승화)라는 캔버스 위에 배치되는 순간 그 모든 사실들 속에서 존 쿳시라는 한 인물이 매직아이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서 당신이 만약 자폐적이라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를 당신의 욕망에
불가해한 대상으로 바꾸는 게 되죠.
반대로, 사랑을 받는 건 당신이 타인의 욕망에 불가해한 대상이 되는 거죠.
존과 한 침대에 있는 건 두 개의 불가해한 로봇이 서로의 몸과 불가해한 교섭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 <줄리아> p84
[그가 사랑을 했다면,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내 이름을 붙인 환상을 사랑했을 거예요. ]<아드리아나> p273
[그가 자신의 창작의 원천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것은 지나친 자기의식이 자신을 불구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영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를
머뭇거렸다는 암시도 되죠. ] 마틴 p331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쿳시처럼,
우리도 모두 픽셔니어라면 어쩔 건가요?
우리가 계속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면요.
우리가 계속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면요.
어째서 내가 당신한테 쿳시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쿳시가 직접 쓴 것보다
더 신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 <소피> p351
작중 인물인 전기작가 빈센트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존 쿳시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 존은 현실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관념적이며 열정이 부족한 데다가 자의식이 강한 인물이다. 영민하고 재빠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현실을 엇박자로 살아가는 외로운 인간, 사랑에도 관념이 앞서서 자신의 앞에 있는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려낸 이상적 인물을 대상 위에 겹쳐 보는 이상주의자. 인터뷰를 하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쿳시가 유명한 작가였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글을 읽는 내내 나조차도 사람들에게 이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에 의문이 들었다.
<청년 시절>에서 과연 이 작중 인물이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해야 했던 것처럼 <서머타임> 에서 전기작가인 빈센트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존 쿳시는 작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아뇨, 아니에요. 나는 진실을 만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무리 가혹해도, 진실이 없으면 치유도 있을 수 없어요.
그게 전부예요.
그게 내가 당신 책을 위해 얘기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에요. ] p133
점묘법으로 그려진 작품을 감상할 때는 일정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그림이 아닌 단순히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어쩌면 존 쿳시는 자전소설 3부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라는 3인칭에 놓고 타인의 관점에서 거리를 둔 채 관찰하는 실험을 했는지도 모른다. 역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는 보통사람들의 삶도 이러한 거리 두기를 통한 글쓰기(승화) 과정을 거친다면 어떤 ‘인상’을 지닌 결과물을 낳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맹 가리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문학으로 표현했기에 나는 그 개별 작품에 살아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전 작품을 모두 읽어왔다. 그런데 J. M. 쿳시는 이 자전소설 3부작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자의식을 문학적 점묘법으로 그려냈으니 그는 이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어떤 자서전보다 가장 정직하게 존 쿳시의 모든 것을 잘 표현해 냈다. 바로 이 점이 문학이라는 허구를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J. M. 쿳시만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