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묭롶 Feb 06. 2024

[데미안]

[헤르만 헤세]

                                                         <자화상>



                                        그동안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술을 마시면 개가 된다는데,


                                  맨 정신에 내가 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비로소, 내가 알던 사람들도 실은


                                  해와 달, 동화에서 털북숭이 손을


                                    문틈으로 들이밀던 호랑이처럼


                                  사람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되었다.


 

                                        Tv에서 유기견을 보면 동정했었다.


                                 먹이와 환경에 길들여진......나는


                                     한 달에 한 번 주는 먹이에


                                     축축한 콧구멍을 들이대고


                             냄새나는 혓바닥으로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자랑스레 핥았다.


 


                            함께 물어뜯으라는 명령을 거부한 날,


                               물어뜯겨 절름발이가 된 발로


                                          사막에 내몰려


                          같은 사람이면 저럴 수 없는데라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개의 언어를 쓰는 부류에 속해


                       사람인줄 알고 살았던 시절이 있다.


 

                  사람으로 불린다고 모두 사람이 아니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p9


 


 술을 마시면 습관적으로 자해를 하고 싶고 자해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를 옭아맨 현실의 무게를 원망하며 술만 마시면 삶이 내 몸에 남긴 상흔을 지퍼 열 듯 열어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그 핏물을 남김없이 뽑아내어 신이라는 존재의 면전에 뿌려주고 싶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불길처럼 태워 올렸던 젊음이 거의 

다 사그라들고 난 뒤에야 나는 그 태워버린 잔해의 재를 떠들어보며 그 속이 탄 냄새를 맡았을때 그렇게 

불 싸지르고 싶었던 무게감과 구속감의 정체가 실은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나는 원망과 증오대상을 찾고자 노력했고, 신이라는 추상의 존재는 나의 모든 혐오를 쏟아붓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다.  나는 나를 태어나게 하고 나에게 그런 운명을 짐 지운 신을 죽도록 원망하며 나 자신의 죽음으로 복수하려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나의 엉망진창인 삶을 

진흙구덩이에서 뒹구는 멧돼지처럼 주야장천 구르고 난 지금은 뭐랄까 조금은 나(또는 주변)를 돌아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전에는 고통이 나를 덮치면 원망과 자기 한탄을 퍼부으며 나 스스로를 동정했다가 혐오하느라 진을 뺐다면, 지금은 직면한 사태를 그전(전에 겪었던 고통들)과 비교해 가며 자연스레 해결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삶이 

내게 남긴 상흔들도 지금은 증오보다는 인정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실은 내가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어려웠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불길이 가장 맹렬하게 타오를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다가, 그 불꽃이 사그라들 즈음에야 불꽃이 어떤 빛깔로 어우러지는지 어떤 형태로 어룽대는 지, 

불꽃이 밝히는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나는 신이라는 

대상을 향해 인간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지 또 왜 그 고통이 하필 나를 연속해서 찾아오는지를 물었다. 물론 

답은 아직도 듣지 못했지만, 나는 『데미안』을 읽으며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을 막연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어내어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 일 것이다.」 p171


 


인간이 살면서 당하는 고통의 기원에 대해 기독교는 원죄라고 말하고, 불교는 업보라고 말하며(여타 종교는 어디에서 원인을 찾는지 모르겠다) 쉬운 말로 팔자 내지는 운명이라고도 말한다.  팔자가 사납다고도 기도 하고 운이 나쁘다도 하며 전생에 죄가 많다고도 하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라고도 하는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을 만약에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동물이나 식물들에게 고통은 어떠한 의미인가?  내 생각 동물이나 식물에게 고통(고통이라고 표현하기 애매하다, 고통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현상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주체의 사유가 선행돼야 한다)이란 천재지변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닐까?  동물과 식물이 자연의 천재지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복의 삶을 살아간다면 인간에게 고통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양성을 양산하는 에너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인간에게 고통은 그 인식과 수용의 과정을 통한 다양한 결과물을 통해 인간이 나아가고 제시해야 할 어떠한 새로운 지점에 대한 화두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숙제(원죄?)이다.  타 생물군과는 달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인식과 사유에서 비롯된 다양한 그림, 음악, 문학 등의 예술장르와 종교, 철학, 과학등의 문화와 문명은 모두 고통을 벗어나고 치유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론의 결과물들이다.  어쩌면 작가들이 인간의 삶과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안에서 많은 해답을 찾으려 

한다면, 고통(운명이라고도 불리는)이 인간 삶의 다양성의 산실이자 인간이라는 존재를 묶는 하나의 

보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p123


 


『데미안』을 읽으며 작중인물인 싱클레어의 방황이 나 자신의 경험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 서양을 떠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겪어야 하는 성장통은 작중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이미지처럼 치열한 고통을 동반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사람으로 태어나 주변환경과 관계 맺음을 통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게 되지만, 실상 '나'라는 인물의 총체적 자아를 갖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아'를 찾는다고 하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거나 배가 부르니 뜬 구름 잡는 소리 한다는 말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요즘 들어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의 원인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공통점이 

자아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의 경험을 비춰볼 때, 삶이 주는 고통에 대한 반대 에너지는 특별한 대상을 찾지 못할 경우 고통을 당하는 자신에게 향하거나(자해나 자살) 자기 합리화가 강한 사람의 경우에는 타인(묻지 마 폭행, 왕따 등)에게 쏘아지게 된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나 가정환경은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소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응이나 모색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순전히 고통은 개인의 문제이며 약한 사람만이 극복하지 못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반복적으로 전개될 뿐이다.


 


 작중인물 싱클레어가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어머니 '에바부인'이나 '압락사스'를 찾는 구도의 과정 끝에 결국은 자기 자신(데미안이자 싱클레어 자신인)을 만나게 되는 결말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딸아이와의 졸업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