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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Feb 07. 2024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 오묘한 미소로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알레고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을 정도로 모나리자의 미소는 인류 본연의 비밀을 간직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그 미소를 단적으로 명명하자면 모든 것을 아는 자가 지을 수 있는 미소라고 할 수 있겠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 나는 불현듯 <모나리자>의 미소가 싯다르타(부처, 깨달은 자, 완성자)의 미소와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삼라만상의 원리를 깨닫고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난 자가 짓는 미소, 

그 미소 앞에서라면 인간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죄를 고백하 어떠한 고민이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구도의 최종 목표인 해탈은 어떤 상태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룰 수 있는 경지인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최종 목표는 번뇌에서의 벗어남이 아닐까!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세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걷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을 버리고 타자를 위한 

희생의 길에 자신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p61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궁극에 달하기 위해 밟아왔던 구도의 과정은 기존의 종교들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나(윤회의 사슬에 놓인)를 벗어나기 위한 구도행위를 통해 나(정신적)는 잠시동안 윤회의 

사슬(육신으로서의 나)을 벗어날 수는 있지만 결국은 나 자신(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매번 돌아올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던 싯다르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궁극에 달하기 위한 자신의 구도행위의 헛됨을 깨닫는 순간,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


 


                            「모든 돌멩이는 하나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p210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미 『승자는 혼자다』에서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 바 

있다. 싯다르타는 궁극적인 내(완성자)가 되기 위한 구도행위가 아닌 강물이 내는 소리(주변에 있는 모든 

완성체로서의 사물)를 듣는 행위를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이 이미 완전한 자임을 깨닫는다.


 


나는 가끔 목적을 위해 한참을 달리던 중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를 잊는 경우가 많았다.  출발은 서울을 

목표로 하고 주행을 했는데, 엉뚱하게 속초나 부산에 가 있는 격이다.  나는 항상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 

왔고 나의 최종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복해지기 위해 달리는데 계속 불행했고, 내 발목을 

과거의 불행(과거의 나)들이 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불행한 것은 

내 삶을 박복하게 운명 지어놓은 신의 잘못이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행복한 나를 만들기 위해 과거의 

나를 부정하며 행복을 또 사랑을 구걸해 왔다.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p159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물시계를 멈추는 로빈슨의 모습을 보며 문득 나는 나에게 

시간이 갖는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투르니에의 책에서 로빈슨이 배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시간을 듣기 전까지 그가 그의 늙음을 의식하지 못했듯이 시간이 없다면 과연 내가 그토록 추구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지금의 나도 과거의 나도 행복한 나일 수 있고 

어쩌면 계속 나는 행복한 나일수도 있지 않았을까?


시간에 조바심치며 계속 과거를 버리고 앞으로 내달릴수록 나는 과거의 삶 속으로 내 꼬리를 잡기 위해 맴을 도는 우르보스의 뱀이 됐던 건 아닐까?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도 또 모레도 행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싯다르타』에서 아들을 향한 상처에서 꽃이 피어나길 바라는 싯다르타의 마음을 표현한 대목에서 하게 되었다.  진흙탕 속에서 눈부시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살아있기에 행복하고 또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나 지자>와 부처의 미소는 그 자체로 완성체(현재의 나)이면서 시간이라는 윤회의 사슬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인간을 향한 연민이자 동경이며 존중이기에 그 미소를 보는 사람들이 쾌청한 하늘 아래 잔잔한 바다를 보는 듯한 평안함을 갖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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