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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Feb 13. 2024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헤르만 헤세]

예술의 모든 장르는 현실(작가의 꿈 속이나 상상 속에 뿌리를 둔 작품일지라도) 세계를 다양한 방법론으로 

표현해 낸다.  장르마다 표현을 위해 사용하는 질료나 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장르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성을 꼽는다면 이는 '함축'일 것이다.



                                           「자연은 수만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단계를 스무 개 정도의 색으로


                                                 축소해서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네.


                                                        이것이 그림이야.」 p20~21


 


회화를 예로 든다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색채를 표현하기 위한 색채의 가짓수는 자연계의 그것에 비하면 대단히 빈약한 한계를 드러낸다.  색채의 한계를 기법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극사실주의 회화에 있어서도 결과물을 놓고 보자면 그것은 언제나 자연물의 일부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100%의 팩트(자연물)가 아닌 일부분이 반영된 결과물(예술품)을 접하며 팩트(자연물)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크고 다채로운 감명을 받곤 한다.  어떤 이는 예술작품이 주는 이러한 감수성을 '마법'이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예술작품이 갖는 독특한 아우라(그 작품만의 고유한 빛)의 정체는 딱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난해함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어떤 회화를 보고 뜻밖에 눈물을 흘릴 때 감상자에게 어떤 부분에 

감명을 받아서 울었는지 묻는다면 대부분 감상자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이러한 예술 작품이 갖는 독특한 감수성(아우라)이 예술장르가 택하는 방법론인 '함축'이 가져오는 

'다의(多意)'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원이 초과되어 버린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더 이상 탈 수 없는 것처럼, 

자연계의 팩트(자연물)가 갖는 완전성은 그 존재 자체의 완전함(완결)으로 인해 다른 의미를 그 안에 

포용하기 어렵다.  (장미가 장미일뿐 호박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은 그 작품 속에 무수히 많은 요소들을 한데 담아냄으로써, 자연계에서 혼재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것(현실에서 인간의 

영혼이 돼지에게 들어간다거나, 인간이 장미가 될 수 없듯이)을 작품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융화시켜 전혀 

새로운 감수성을 결과물로 표출시킨다.



실례로 현실계에서 빈센트 반고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만났던 그의 모습은 그의 작품인 <자화상>에서보다 십분지 일, 백분지 일 만큼도 반고흐의 실제를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고흐가 죽고 난 후 

사람들은 그의 <자화상>을 보며 작품을 통해 반고흐의 삶과 정신세계의 총체성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헤르만 헤세는 예술 장르의 '함축'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에게 장르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연이라는 틀 위에 놓인 그의 삶을 그리고 보편 인간의 삶을 표출하기 위해 그는 음악, 회화, 문학 등 방법론에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장르를 넘나들며 인간의 존재의미와 삶에 대한 성찰에 다가가고자 했다.(종착점을 향한 여정이 걷든, 달리든, 걷다가 뛰든, 노래를 하며 달리든, 깽깽이 발로 뛰든 전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것처럼)  그가 장르를 유념하지 않았음에도 이 작품에서 자신의 회화기법을 

표현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어쩌면 그가 선택한 방법론이 인간의 외면적인 삶 위에 내면적인 삶을 투영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초상화를 그리는 이 끔찍한 투쟁에서 어떠한 개인의 운명이나 그것에 대한


               해명뿐 아니라 인간적인 것, 그리고 보편적인 것, 필연적인 것에 대한 설명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경건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 두려움도 회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진도, 베기도 찌르기도, 승리도 몰락도 없었다.  


            그는 승리했고 몰락했으며, 괴로워했고 웃었으며, 또한 이를 악물고 버텨 왔고, 


                                      죽였고 죽었으며, 낳았고 태어났다.」 p96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헤르만 헤세의 예술 세계가 어디에 뿌리하고 있는지와 위대한 예술작품들의 탄생비화를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불사르며 압생트에 취해 현란한 색채를 

듬뿍 들이마신 붓을 거칠게 유화지에 뿌리듯 칠하는 반 고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가장 

치열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업한 고흐의 <자화상>이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어쩌면 헤르만 헤세의 작중 인용처럼 그 작품을 그리는 동안 살았으며 죽었고 기쁘고 또 슬펐으며, 

죽었고 죽였으며, 낳고 태어나는 인류보편의 삶의 과정을 '함축'이라는 방식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집약시켰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한 편의 소설도 한 장의 그림도 한 장의 사진도 모두 그 자체로 감상자의 삶을 포용하는 우주가 됨으로써 예술 작품은 인간의 삶에 빛나는 지점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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