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에는 1. 2차 세계대전과 개인사적 아픔을 모두 견뎌낸 한 인간의 성찰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오는데 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헤르만 헤세의 모든 작품은 生을 영위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p9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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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유리알 유희 2권』p78
그에게 삶을 사는 모든 인간은 그 본성의 선악을 떠나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 즉
가능성의 존재이다.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그가 말하는 '인간'은 다른 존재를 향해
열려있는 순환적 존재이다. 『유리알 유희』의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 부분에 나오는 다자의
이야기는 장자의 '나비의 꿈'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 고전 <구운몽>의 내용처럼 짧은 순간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다자는 인간사의 업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택한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성찰로 나아가는 존재인 인간이 겪는 삶의 과정을 글로 담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 성찰의 과정은 도가의 정서에 기초한 '초극(자아를 넘어 전 존재로 나아가는)' 『싯다르타』,
이나 예술을 성찰의 도구로 다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표출된다.
「그는 초상화를 그리는 이 끔찍한 투쟁에서 어떠한 개인의 운명이나
그것에 대한 해명뿐 아니라 인간적인 것, 그리고 보편적인 것,
필연적인 것에 대한 설명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경건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 두려움도 회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진도, 베기도 찌르기도, 승리도 몰락도 없었다.
그는 승리했고 몰락했으며, 괴로워했고 웃었으며,
또한 이를 악물고 버텨 왔고, 죽였고 죽었으며,
낳았고 태어났다.」 p96『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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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고, 가능성의 존재지.
우리 인간에게는 완전함도 완벽한 존재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네.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셈이지. ~자네는 예술가로서 많은 형상들을 만들었네.
이제 정말 그런 형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한 인간의 형상을 우연사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순수한 형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자네는 예술가로서 이러한 인간상을 실현하는 셈이지 」 P42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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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돌멩이는 하나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p210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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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난 그만 지고 말았어. 그분의 맑고 밝은 고요함,
인내와 평온에서 무언가 내게로 옮아오는 것이 있었네.
갑자기 그 노인이 이해되고, 그의 전 존재를 차지해 버린 변화를,
인간에게서 고요함으로, 언어에서 음악으로, 생각에서 전일성(全一性)으로
돌아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 그분을 뵙는 동안 그 자리에서
내게 베풀어진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그분의 미소와 밝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유리알 유희 1권』p338
『유리알 유희』에는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전생애에 걸쳐 추구해 온 이상적 세계가 담겨있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나오기 위해 그의 모든 전작들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을 읽어가며 그 속에 녹아든 그의 전작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감동은 이 책의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온 압락사스는 정해진 틀, 주어진 틀에서 나아가 자신만의 신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골드문트의 방황과 클링조어의 그림, 싯다르타의 구도, 할러의 각성 등)을 통해 인간의 삶과 정신 그리고 이를 둘러싼 환경을 아우르는 총체적 도구 '유리알 유희'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막 그가 체험하고 눈으로 보았던 것,
즉 왕위와 전쟁과 감옥에서 깨어난 것,
샘물 곁에 서 있는 것, 방금 물을 약간 엎질렀던 바가지,
그때 그가 했던 생각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같은 재료로 되어 있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꿈이고, 환영이고, 마야가 아니었던가?」
『유리알 유희 2』p333
인류문명이 큰 위기를 겪고 난 후, 중립지역에 설치된 카스탈리엔은 순수학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인류문명의 순수성을 보호하고 이를 계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카스탈리엔에서는
인류문명의 산물인 음악, 역사, 수학, 철학, 과학 등의 개별학문을 아울러 다룰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고 이 도구와 이를 다루는 도식의 총체를 '유리알 유희'라고 명명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삶은 전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현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근본적으로
그 역동적 현상의 미학적인 측면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것도 주로 리드미컬한 진행 과정이라는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 1권』 p143
『유리알 유희』는 카스탈리엔의 '유리알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에 대한 전기 형식을
띤 작품으로 그의 전작 『황야의 이리』가 취한 <할러의 수기>와 비슷한 형식을 취한 작품이지만
이 책에 담긴 정서와 서사는 그의 전작 모두를 담아 녹여낸 듯한 특징을 지닌다.
이 작품은 외견상으로는 '유리알 유희'를 통해 지적 수호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중요함과
그들의 독선과 오만이 어떠한 폐해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경고와 '유리알 유희'의 집전을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인류문명의 산물들을 한데 아우름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통찰로의 나아갈 바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외견과 달리 이 책이 지닌 정서는 '유리알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명인과 그의
스승 음악명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헤르만 헤세가 나아가고자 하는 성찰의 구체적 목표상이
무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요제프 크네히트의 시 <단계> 中
~공간에서 공간으로 명랑하게 나아가야지
어디에도 고향인 양 매달려선 안 되네
우주정신은 우리를 구속하고 좁히는 대신
한 계단씩 올려 주고 넓혀 주려 한다.
생의 어느 한 영역에 뿌리내리고
친밀하게 길드는 바로 그 순간, 나태의 위협 밀려오나니
떠나고 여행할 각오된 자만이
습관의 마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
죽음의 순간에조차 아마 우리는 젊게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른다.
생의 부름은 결코 그치지 않으리니.......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유리알 유희 2권』p176~177
헤르만 헤세는『유리알 유희』를 통해 소설 문학의 가장 큰 미덕인 '추체험'의 세계를 독자
앞에 열어둠으로써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생에 마침표를 찍고서야 자신의 생의 총체를 확인하게
되는 우리 독자들에게 독서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통찰력과 인생의 나아갈 바를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자신의 시로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시인은 아마 슬픈 고독자이고,
음악가도 우울한 몽상 가였을지 모르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그들의 작품은 신들과 별들의 명랑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라네.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미 그들의 어둠과 불안이 아니라
한 방울의 순수한 빛, 영원한 명랑성이지.
모든 민족과 언어가 신화와 우주 생성설,
종교 속에서 세계의 심오한 부분을 밝혀 보려 할 때에도,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것, 가장 높은 것은 이 명랑성이야.」
『유리알 유희 1권』 p417
그가 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는 성찰의 단계에서 지니는 명랑성은 우주 속에서 순환적 존재로서의
각성된 자아를 통해 언제든 타인과 세계를 향해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용감한, 이타적,
자기애(自己愛)적인 존재가 지닌 특성이다. 이러한 명랑성을 지닌다면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마야(無)이기에 자아를 극복한 초극(알에서 깨어난 신 압락사스)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헤르만 헤세는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제로 한 유리알 유희를 집전하는 저마다의 유리알 유희
명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