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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Jun 17. 2024

즐거운 나의 집.

5화. 빚.

민선이 아직은 어둠에 잠긴 새벽을 오토바이로 가르며 질주하는 시간에 민주는 침대 옆 협탁을 손으로 더듬어 스마트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30분, 나직한 한숨을 내쉰 민주는 손에 든 스마트폰의 액정을 아래로 가게 뒤집어 놓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암막을 쳐둔 창으로는 한 점의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아 실내는 암흑으로 가득했지만 민주의 의식은 항상 불이 켜진 채 폐장이 없는 카니발처럼 쨍했다.  

8월의 정오에 내리쬐는 태양아래서 느끼는 현기증처럼 울렁이는 두통이 파도처럼 민주를 덮쳤다.  몸을 웅크린 채 파도가 지나가길 바라는 민주는 사무엘을 애타게 찾았다.  


'사무엘..  나의 사무엘... 차라리 그를 따라갈걸.......'


오전 일곱 시 출근 준비를 마친 민주는 냉장고 음료 칸을 열고 500ml 생수 한 병을 열어 한 모금을 마시고는 남은 물병을 챙겨 들고 식탁 위에 놓은 차키를 집어 들었다.  차키 옆에 놓인 약병 통을 잠시 내려다본 민주는

한숨을 내쉬고는 현관 앞에 놓인 구두를 신기 전 신발장에 붙어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난파선 같구나.  어제를 끝내지 못해서 다시 오늘을 사는 나는 당장 침몰해도 이상하지 않을 딱 그 정도일까.

이제 더 이상은 도망칠 곳도 없는데.........'


난파선 같은 비참한 거울 속 자신의 얼굴 위로 어제 오후에 만난 동생 민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았지만

놀랍도록 지 않은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





민선은 은행이 창구를 마감하기 직전인 오후 3시 58분에 그녀를 찾아왔다.  청원경찰이 ATM기 옆쪽 출입문의 철제 셔터를 오후 4시에 맞춰 닫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 때 그녀는 오토바이를 은행 앞에 세워둔 채 안전모를 벗어 수납함에 넣고는 안전모에 눌린 짧은 머리를 손으로 탈탈 털어내면서 은행으로 들어섰다.  

막상 은행으로 들어와서는 갈 곳 잃은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간 청원경찰이 도움이 필요한지를 묻자

그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 여기.. 한민주 씨가 근무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녀의 말에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기쁜 표정의 청원경찰이 그녀를 이끌고 지점장실로 향하며 말했다.


"아. 저희 한민주지점장님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안에 계십니다."


'금천구청 김주무관은 한민주가 여기 근무한다고만 알려줬는데 지점장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청원경찰이 지점장실 문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지점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청원경찰의 목소리에 모니터를 보고 있던 민주가 고개를 들어 출입문 쪽을 쳐다보다가 민선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십 년 만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머릿속에 동생은 열네 살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주는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해도 민선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음지에서 컸지만 한 번도 불이 꺼지지 않았던 민선의 변하지 않는 눈동자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었다.  어차피 국내로 돌아가게 되면 언젠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민주는 고객을 대하듯이 출입문 입구에 엉거주춤 서 있는 민선에게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앉은 민선은 난감한 문제를 앞에 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녀는

이십 년 만에 만나는 언니라고 부르기도 낯선 한민주를 만나러 오기 전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했다.

승호가 친구들이 거지라고 놀린다며 이사를 가고 싶다고 그녀를 조르지만 않았다면 솔직히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독산동 집을 해결하려면 이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했다.  


'음료수라도 사 올 걸 그랬나?  빈 손이 여간 민망한데.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얘기 안 했네.

 설마 나 누군지 모르겠지.

에이.. 지난 시간이 얼만데....'


민선의 불안한 눈빛과 다르게 민주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잠시 말없이 민선을 바라본 민주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명함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민선에게 건넸다.


"한민선 씨,  저는 한민주입니다."


 명함을 엉겁결에 건네받은 민선이 '한민선 씨'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민주의 눈을 응시했다.

표정이 읽히지 않는 얼굴, 안경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눈동자, 다시 굳게 다물린 입술이 민선의 눈에 담겼을 때 그녀는 화가 났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를 버리고 떠났지.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주의자.

  그래놓고 자기가 피해자인 척 울었던 나쁜 년.'


절로 주먹을 꼭 쥔 민선을 바라보던 민주는 차라리 실컷 두들겨 맞기라도 하면 잠이 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앙다문 민선의 눈동자에서 찬란한 불빛이 활활 타올랐다.  


'여전하구나.  한 민선.  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살아있구나.'


맑은 물속처럼 감정이 투명하게 비춰 보이는 민선의 분노한 얼굴을 민주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민선이

갑자기 그녀 앞에 제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눈앞에 보이는 머리통에 민주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앞머리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머리카락 속을 들여보인 민선이 말했다.


"너.  이거 알지?"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으로 벌린 머리카락 사이로 동전만 한 크기의 공백이 드러났다.  순간 원형탈모인가 싶은 생각과 함께 여덟 살 봄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덟 살의 민주는 책이 좋았다.  항상 붙임성 있다고 어디서나 예쁨 받는 동생과 다르게 그녀는 사람들이 불편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도 놀리지도 않는 책이 좋았지만 엄마는 그 좋은 것을 많이 사줄 수가 없었다.   건너편 동네에 사는 아이가 자기 집에 책이 많다고 자랑할 때 그 아이에게 잘 보여서라도 책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렇게 진영이와 어렵게 친해져서 겨우 그 아이 집에 갔을 때 민주는 그곳이 천국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딸은 두고도 읽지 않는 책을 건너편 동네에 산다는 입성도 허름한 아이가 날마다 와서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대자 진영의 엄마는 일주일 만에 민주에게 앞으로 오지 말라며 대문 밖으로 그녀를 내쫓았다.

초등학교 일 학년 예비소집이 있던 날 가방에 한가득 담긴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 민주는 너무나 행복했다.  글자만 쓰여 있으면 다 좋았는데 여러 권의 그것도 자기만의 것이라니 뛸 듯이 기뻤다.  

소중한 책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손을 씻고 돌아온 민주의 눈에 밥상 위에 웅크린 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동생 민선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불안감에 휩싸인 민주가 동생의 어깨를 확 잡아 돌려세웠을 때 민주의 눈에 그 소중한 책에 삐뚤빼뚤 쓰인 자신의 이름 '한 민주'가 보였다.  

당장 동생의 손에 들린 크레파스를 뺏어 던져버린 민주는 동생을 앙다문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언니가 때려도 웃기만 하는 민선은 울면서 자신을 때리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  내가 언니 좋아하는 책에 언니 이름 써놨어.  근데 왜?"


동생의 말에 엉엉 울던 민주가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내 책 더럽혔잖아."


주먹으로 때려도 동생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자 더 화가 치민 민주는 동생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감아쥐고는 있는 힘껏 발로 동생을 걷어찼다.  민선이 아파서 울먹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 민주는 그런 동생을 한 번 보고는 자신의 손가락에 두피까지 딸려 뽑혀 있는 머리카락 한 움큼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밤에 돌아온 엄마는 동생의 상태를 보고 기겁을 해서 약국을 다녀왔고 그렇게 민선의 앞머리에는

동전크기만 한 땜통이 생겼다.  앞머리에 반창고를 붙인 동생의 머리를 내려다본 민주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동생에게 약속을 했다.


"내가 이 땜통 대신 나중에 너 소원 하나 꼭 들어줄게."


민선은 언니의 뜬금없는 약속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씩 웃고 말았다.





그래서 민선이 잊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했던 약속은 오래된 부채가 되어 복리로 민주에게 돌아왔다.  그때까지 표정이 없던 민주의 얼굴에 당황이라는 표정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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