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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Jul 01. 2024

즐거운 나의 집.

7화. 벌레 먹은 밤.

택시에서 내린 민주는 스마트폰을 터치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을지로 3가에 위치한 한정식 전문점 다연은

인당 십오만에 달하는 식대도 화제였지만 그만큼 예약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선박 쎄븐 스타 좌초 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대한은행장은 지점장 회식 일정을 잡을 것을 지시했다.  본점 박 과장이 있는 인맥을  

모두 동원해서 다연에 3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을 예약했지만 지점장이 아닌 박 과장은 회식 참석 대상이 아니었다.

다연의 출입문 앞에 서 있는 민주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인천 지점장이었다.

출입문을 열어준 그가 옆으로 물러서자 민주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예약된 진달래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자리에 와 있던 은행장과 다른 지점장들이 그녀를 손짓으로 반기며 옆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어.. 한 지점장 여기 앉지."


은행장이 자신의 옆자리를 권하자 다른 지점장들 그녀를 부르며 들어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식탁 아래로 내렸다.  옷걸이에 재킷과 가방을 건 민주는 앉아 있는 인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은행장 옆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식당 종업원이 뜨거운 스팀 수건이 얹어진 접시를 민주 앞에 놓아두었다.  식탁 위에는 이미 콜키지로

준비된 양주 서너 병이 놓여 있었고 여섯 시 삼십 분으로 예약된 진달래실은 거의 다 찬 상태였다.

정갈하고 아름답지만 굉장히 양이 적은 몇 가지의 요리가 놓이고 다시 나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을 때 은행장이 밸런타인 삼십 년 산의 코르크 마개를 직접 뽑았다.  그는 술병을 든 채로 민주에게 물었다.


"한지점장.  어떻게 아메리카에서는 스트레이트로 드셨나?  아니면 언더락?"


은행장의 말에 식탁 위에 놓인 스트레이트 잔을 집어든 민주가 은행장 앞에 빈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은행장은 대번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앗핫핫핫.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래.  나도 스트레이트라네."


은행자에게서 첫 잔을 받은 민주는 스트레이트 잔 하나를 들어 은행장에게 술 한잔을 건넸다.


"그렇지.  아무래도 아메리카에서는 잔 돌리기는 하지 않을 거야.  그래.  우리 다 같이 잔을 채우지."


식탁 위에 놓인 양주는 코르크 마개를 따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지점장들은 은행장이 권하는 술잔을 그저

감사히 넙죽넙죽 들이켰다.  누구도 용감하게 나서서 언더락을 든 손은 없었다.  열심히 술을 권한 것에 비해 본인은 많이 마시지 않아 정신이 비교적 온전한 은행장이 민주를 넌지시 지켜보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한 지점장, 아까부터 음식은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건가?

 음식이 전부 그 대론 거 같은데......."


그때까지 주변에서 말을 걸면 겨우 대답을 하던 민주는 은행장의 질문에 잠 멈칫했지만 다시 손에 든 술잔을 은행장에게 들어 올리며 답했다.


"아무래도 귀한 분 모시는 회식자리가 처음이라 어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은행장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자네.  참.... 이리 겸손해서야.  원... 자네.. 그거 아나?

 인사팀에서 자네 스카우트 결재 올라왔을 때 한 번에 ok 한 게 나라네.

 내가 참 안목이 있단 말이야..."


은행장의 말에 주변에 있는 지점장들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고개를 끄덕여 은행장의 말에 호응하고 있음을 표시했다.  

큰 악재로 번질 수 있는 일을 미리 진화하여 대비한 민주를 치하하는 자리가 된 회식자리가 끝난 뒤 민주는

기사가 빼놓고 대기 중인 차량의 뒷 좌석 문을 열어 차량에 탑승하는 은행장을 보필했다.  출발하는 차량

옆에서 도열한 지점장들의 인사를 받고 은행장이 탄 차량이 앞 사거리를 지난 뒤에야 식당 앞에 있던 지점장들은 삼삼오오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대리운전을 부르기 부담스러워 택시를 이용한 민주는 저마다 급하게 잡은 택시를 타고 지점장들이 전부 사라진 뒤에도 길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칠월이라 은행은 진즉부터 에어컨을 틀어왔지만 에어컨 바람과 달리 어디선가 불어오는 밤바람은 초여름답지 않게 선선했고 그 바람을 맞으며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밤하늘에는 손톱달이 걸려 있었다.

불현듯 빈속에 들이부은 양주에 불이라도 붙은 듯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한없이 시리기도 해서 민주는 허리를 접듯이 숙였다.  옆에 있는 가로수를 손으로 겨우 붙잡고 한참을 숨을 고른 민주는 겨우 허리를 펴서 몸을

세우고는 마침 앞에 멈춰서는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요?  손님."


택시 기사의 물음에 민주는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그 순간 제 눈앞에 동생인 민선이 들이민 동전크기의 하얀 땜통이 떠올랐다.


동생이 요구했던 '빚'을 떠올린 순간 그녀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입을 열어 말했다.


"독산동 388-8 번지로 가주세요"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주소가 귀에 들린 순간 그녀는 경악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휴'  깊은 한숨이 속을 불길처럼 태우고 있는 양주에서 나온 수증기처럼 흘러나왔다.





택시에서 요금을 정산하고 내린 민주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잠긴 공사현장 가운데 켜진 빛 한 점이었다.  대지와 건평을 다 합쳐도 2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집의 작은 창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과거 그녀가 한때 집이라고 머물렀던 곳이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에 켜져 있는 불은 그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손톱달과 어둠 속에 반딧불처럼 약하게 빛나는 불은 어둠을 그리고 삶의 고통을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훅 불면 꺼질 촛불처럼 위태로운 그 가냘픈 빛을 의지해서 삶을 헤쳐나가라는 것은 부러진 호미로 밭을 메라는 계모의 말처럼 가혹한 것이었다.

민주는 그 불빛을 보며 아이러니하게도 허기를 느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어린 시절은 항상 배가 고팠다.  어쩌면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다른 것이 고팠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동생과 학교에서 돌아오던 민주는 인근 뒷산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알밤을 신이 나게 주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밤을 냄비에 넣고 열심히 삶은 뒤 기대에 가득 차서 한입 깨문 그녀는

금세 밤을 애퉤퉤하며 내뱉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밤은 온통 벌레가 살을 파먹고 벌레똥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위염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더 진행되면 위궤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민주의 위장 내시경 사진을 들어 올린 의사는 차트와 민주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살펴보며 지극히 직업적인 태도로 그녀의 상태를 설명했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몸뚱이는 멀쩡해 보이지만 이미 내 속은 과거라는 벌레에 파 먹혀 벌레똥으로 가득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사무엘을 잃고 난 뒤 더는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그래.  이제 아무것도 상관없어.  과거를 지워야 내가 살 수 있어.

 먼저 이 집을 없애버려야 해.'


주먹으로 눈물을 훔친 민주는 결연한 표정으로 불빛을 등지고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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