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형상화를 넘어 감각의 실체화로 넘어가다.
한강. 내 여자의 열매.
「모든 감정에 육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후회나 슬픔, 분노는 물론
사소하고 자질구레해 보이는 감정들에까지
구체적인 생김새와 감각이 있었다. 」
<붉은 꽃 속에서> p284 『작가세계』 2000년 봄호 발표
보통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직면할 때 그 고통을 부정하게 된다. 마치 악몽을 꾸면서 어차피 이거 꿈일
뿐이야. 눈을 뜨면 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통 그 자체가 없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아무리 고통을 부정하고 모른 체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심인성’이라는 단어는 이제 낯설지 않은 우리 주변의 일상이 되었다. ‘심인성’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의사와 주변인들은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한다고 이건 본인의 의지가 강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심인성’ 질병을 앓는 것 자체가 의지박약의 산물이며 그러한 질병의 원인이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오히려 질병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우린 경험으로 알고 있다.
소설문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중에 느끼는 감정을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 형상화하는 장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라는 형체 없는 대상을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이라는 틀에 넣어 그 형상화된 산물을 독자에게
독특한 ‘감수성’으로 전달한다.
한강의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를 읽으며 나는 한강의 글쓰기가 소설문학의 형상화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도시의 삭막함과 동물적 흉포함에 병들어 말라가다 식물이 되어버린 <내 여자의 열매> 속
여자는 육식을 거부한 채 말라가는 <채식주의자>의 작중인물 영혜를 떠올리게 한다. 한강의 작중인물들은 단순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병리적 징후를 증거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병리적 징후(육식거부, 거식증)를 식물이
되어버린 여자라는 실체로 우리 앞에 보여준다.
어찌 보면 한강의 첫 소설 『검은 사슴』이 아직은 일반적인 소설의 형상화에 머물렀다면, 이후 한강은 1997년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감각’의 실체화로 나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흡사 인간의 마음속에 사는 다섯 개의 감정(기쁨,
슬픔, 버럭, 소심, 까칠)을 다룬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지닌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한강은 ‘심인성’이라는 현대인의 질병적 징후에 다가가는 통로를 만들어 내고 있다.
「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 없이 멀어져 가는
허공의 푸르른 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p10
『검은 사슴』1988년 출판
「바다까지 걸어가면 그걸 알 수 있을까, 하고 아이는 생각했다.
저 빛이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볼 수 있을까. 」
<해 질 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p47 『창작과 비평』 1999년 여름호 발표
「어떤 나무는 빛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나무는 그늘에서 태어나나.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잎사귀는 똑같이 푸르다.
그들의 잎사귀는 햇빛을 향해 고스란히 펼쳐진다. 」
<붉은 꽃 속에서> p266~267 『작가세계』2000년 봄호 발표
이렇듯 마음의 병이라는 질병을 지닌 채 살아가지만 그걸 표현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치유의 통로를 한강은 소설을 통해 모색하고 있다. 그 모색의 과정을 그녀의 단편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햇빛에
놓이지 못한 나무들이 태양을 향해 간절하게 뻗어나간 결과 온통 뒤틀리고 휘어진 가지의 모습들을 보며 한강은 아마도
『검은 사슴』처럼 막장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공동의 운명을 지닌 사람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묻는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존재이며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것인지를…….
나는 『검은 사슴』, <해 질 녘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아기부처>, <어느 날 그는>등의 작품들 속에서
제기된 질문들이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이 단편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너한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있을 거다......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후회되는 날이.
그날이 빨리 오면 좋은 거고,
너무 늦게 오면 후회해도 늦은 거고. 」
<아기 부처> p170 『문학과 사회』1999년 여름호 발표
「나는 사십구일 만에 흰 리본들을 태웠습니다.
순식간에 그 무명천들이 불티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들여다보면서,
후에 나는 누구의 머리에 나비가 되어서
내려앉게 될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느닷없이 아이를 낳고 싶다고,
어머니처럼 얼굴이 달떡 같은 계집아이를
피 흘리며 낳고 싶다고 나는 생각하였던가요. 」
<흰 꽃> p334 『하이텔문학관』 1996년 여름호 발표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아기 부처> p174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p39 『흰』2016 년 출판
하나의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고 무수히 많은 열매를 만들어 다시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검은 사슴』에서 출발한 한강의 글쓰기는 다시 새봄이 오면 또 새로운 아내들이 돋아날지를 궁금해하는
‘남자’의 생각대로 단편소설의 씨앗이 장편소설로 꽃을 피워냈다. 그러한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겐 그 누구에게나 그 무엇에도 포기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흰’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속으로 손을 뻗어 그걸 주우려고 하는데,
그때 갑자기 깨달은 거야, 내가 죽었다는 걸.
갑자기, 살아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살아나서 저 파란 돌을 건지고 싶었어.
다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니까 눈물이 났어.
다시……돌아와야만 한다는 게. 」
<어느 날 그는> p215 『세계의 문학』1998년 여름호 발표
「 ~......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342-344 『바람이 분다, 가라』 2010년 출판
「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 새 없이 뽑아져 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고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 73 『희랍어시간』2011년 출판
절대 올 것 같지 않은 어두운 새벽을 뚫고 날이 밝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푸르스름한 새벽의 박명처럼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흰’ 것을 꽃피워낼 수 있는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한강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거듭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아프지만 그 아픔 속에서도 웃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되는지도 모른다. 말로 하는 위로보다 진심을 담은 포옹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경우처럼 나에게 한강의 글쓰기는 실체적으로 다가온다.
「이제 아내의 몸에는 한때 두 발 동물이었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포도알같이 맺혀 있던 눈동자는 다갈색 줄기 속에 차츰 파묻혀갔다.
아내는 이제 볼 수 없었다.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 」
<내 여자의 열매> p39 1997년 『창작과 비평』봄호에 발표
『검은 사슴』이라는 씨앗에서 자라나 꽃 피우고 그 열매가 다시 피워낸 한강의 소설들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어떤 모습일지를 나는 <내 여자의 열매> 속 남자처럼 기다려본다.